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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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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5·18정신, 어떻게 계승할까요?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5·18을 통해 깨닫게 된 역사적 의미를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5·18민주화운동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5·18정신’이라고 합니다. 이 정신을 우리는 어떻게 계승해야 할까요?

     

     

    민주주의와 인권

     

     

    우리나라 헌법 제1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 조항을 통해 우리는 대한민국이 ‘국민 모두가 주인인 민주공화국’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조항은 처음 헌법이 만들어지던 1948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 수정 없이 굳건히 헌법 제1조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의 이 내용을 지키기 위해 우리 사회는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그 대표 사례가 5·18민주화운동입니다. 국가권력은 국가의 주인인 국민을 지키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나 1980년 광주에서 국가권력은 국민에게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시민의 인권이 유린 되었습니다.


    인권은 개인과 개인 간 관계에서 침해될 수도 있지만, 군대·경찰 등 강한 힘을 지닌 공권력에 의해서 도 침탈됩니다. 오히려 이때가 더 큰 희생과 피해 를 낳게 됩니다.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의한 시 민들 희생은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 침해였습니다. 광 주시민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 습니다. 인권을 지키기 위한 5·18민주화운동! 그 정신은 우리에게 민주주의와 인권 존중의 소중함을 한 껏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저항과 참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 책임을 묻는 재판에서 독일군 장교 아이히만은 ‘자신 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기 죄를 부정했습니다. 계급질서가 명확한 군대에서 명령 은 거부하기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명령과 규칙을 잘 지킨 한 군인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삶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당시 독일 군인은 명령과 규칙을 무조건 지켜야 했을까요?

     

    불복종과 저항은 민주와 인권, 자유와 정의를 위해 자신의 양심에 따라 당당하게 ‘아 니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절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저항하고 적극적 으로 참여할 때에 비로소 ‘민주주의 만세’를 외칠 수 있습니다. 1980년 5월,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에 맞서 시민들은 저항했고, 그 결과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릴 수 있었 습니다. 이후 ‘6월 민주항쟁’을 통해서 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으며, 2000년대에 들어서는 ‘촛불집회’를 통해 민주주의의 퇴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 당시에도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저항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 쳐 수백만이 넘는 인파가 참여했음에도 시위는 평화롭게 진행됐으며, 경찰도 폭력적인 진압보다는 시민들 안전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전국적인 국민 저항은 결국 정 권을 교체시켰고, 헌법 제1조처럼 국가의 주인이 국민임을 확실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서로 함께 하는 삶

     

    촛불 하나는 작고 미약하지만 수백만 촛불이 모이면 거리를 밝히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촛불집회에서 확인했습니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할 때에 바꿀 수 있습니다.


    공동체정신은 사회 구성원이 서로 나누고 배려하며 함께 할 때에 그 가치가 확대됩니 다. 1980년 5월 공동체정신은 ‘주먹밥’과 ‘헌혈’로 상징됩니다. 광주시민들은 주먹밥 을 나눠 먹고 부상자에게 피를 나눠주며 서로 고통을 이해하고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의 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지금도 뉴스에서 사람들이 시위를 하거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들의 목소리에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나요?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 언젠가는 내 고통이 될 수도 있습니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함께 하는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나를 위하는 길도 됩니다. 정의로운 사회,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 를 만들기 위해 함께 노력할 때에 우리 사회는 더 밝아집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01. 다음 시는 반나치 운동을 했다가 강제수용소에 장기 구금당했던 독일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의 「나치가 그들을 덮쳤을 때」입니다. 이 시에서 ‘나’는 왜 침묵했나요?
    또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은 왜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나요? 그 이유를 적어봅시다.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다음 그들이 사회민주당원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
      그다음 그들이 노동조합원을 덮쳤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다음에 그들이 유대인에게 왔을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
      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02. 오월 정신과 우리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1) 여러분이 생각하는 ‘오월 정신’은 무엇인가요? 각자가 생각하는 오월 정신을 소개하고 그 이유를 발표해 봅시다.

     

     

    내가 생각하는 ‘오월 정신’

     

     

     

     


    친구가 생각하는 ‘오월 정신’

     

     

     

     

     

     

    2) 여러분 일상생활 속에서 오월 정신이 필요한 부분은 어디인지 토의해서 발표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5·18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1980년 5월 광주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은 많습니다. 하지만 40여 년 정도 시간이 흐르다 보니 현재는 5·18을 과거의 사실 그 자체로만 배우고 기억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우리는 5·18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반복되는 불행한 역사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됩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 말을 우리는 쉽게 흘려버리곤 합니다. 과연 5·18민주화운동은 이미 지나간 일회성 사건에 불과할까요? 우리 삶 속에 또 다른 5·18은 없을까요?


    5·18민주화운동 당시 비정상적인 국가권력 모습은 이후에도 용산참사, 세월호 사건 등 비슷한 형태로 재현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불행한 역사는 자꾸 반복되는 것일까요?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두 나라가 있습니다. 독일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 나치 희생자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으며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통해 유 럽의 과거사 문제 해결과 평화 증진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 독일: 당시는 독일 통일 전이어서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이다. 

     

    반면에 일본은 총리를 비롯 한 일부 정치인들이 침략 전쟁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전쟁 범죄자 위패가 있는 야 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면서 동아시아 평화를 해치고 있습니다. 과거 잘못을 기억하고 반성하는 국가와 변명만 하며 스스로 면죄부를 가지려는 나라,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 서 불행한 역사가 반복될까요?

     

    역사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되고 기록을 통해 다시 기억됩니다. 윤상원이 전남도청 안 에서 최후의 항쟁을 앞두고 했던 말은 우리가 왜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계승해 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패배하지만,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

     

     

    그는 정의와 역사발전을 위해 죽음까지 감수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사람들의 헌신 속 에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면서 역사 속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5·18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

     

    5·18과 같은 민주화운동을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가 종종 제작됩니다. 이들 영상물을 보며 우리는 ‘내가 당시를 살았다면, 나는 시위에 참여하여 국가폭력에 맞설 수 있었을까?’라고 자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시위에 참가한 영상 속 주인공을 특별한 존재로 여깁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특별한 존재들이 아닌 우리 주변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생각하며 총칼을 들이댄 계엄군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국가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비판 없이 따르며 국가폭력의 공범이 된 것 뿐입니다.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이를 ‘악의 평범성’이라고 표현했습니다.

    +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 전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그가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사람의 얼굴치고 너무나 평온하고 평범해 보이는 데에 놀랐다. 이를 한나 아렌트는 비판의식이 없는 한 개인이 얼마나 큰 악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생각하며 ‘악의 평범성’이라 표현했다.

     

    평범한 개인은 상황에 따라 민주화운동의 참여자가 될 수도 있지만, 국가폭력에 앞장 서는 가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앞으로도 우리가 비판의식이 없이 국가 명령 에 순응만 하다 보면 얼마든지 또 다른 5·18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불의 에 저항하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키는 길임을 깨닫는 것, 이것이 우리가 민주시 민으로서의 자질을 키워야 하는 이유이며 5·18민주화운동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이기 도 합니다.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기념을 통한 기억

     

    개인 기억은 유효기간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기억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 집단은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기억을 재구성해 기념합니다. 1980년 5월의 기억도 시간이 지 나면 점점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기억하려면 기념을 통해 기억 해야 합니다.


    기념의 목적은 ‘살아있는 기억’을 만들어내는 데에 있습니다. 특히 직접적인 기억이 없는 청 소년들에게 유의미한 기념활동은 역사적 사건 에 생명을 불어넣어 줍니다. 매년 광주에서 열 리는 청소년 민주주의 축제 ‘5·18 레드페스타’ 는 5·18을 단순히 기념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 의에 대한 청소년들의 다양한 생각을 공유하고 함께 실행하는 열린 광장입니다.

     

    5·18과 같이 꼭 기억해야 하는 사건들을 살아 있는 기억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의미 있는 기 념 활동에 청소년들 관심과 참여가 꼭 필요합니 다. ‘구경꾼’이 아니라 공감할 수 있는 기억을 만들고 전파하는 적극적인 ‘행위자’로 함 께했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을 넓혀가요


    만약 여러분이 5·18기념품(굿즈)을 만든다면, 어떤 물건을 만들고 싶은가요?
    다른 역사적 사건들을 활용한 기념품을 참고하여 디자인 기획안을 작성해봅시다.

     

     

     #동백꽃배지

    #제주43사건

    #노란리본배지

    #세월호 

    #작은소녀상

    #일본군 위안부 

     

     

     5.18기념품(굿즈)

    기획안

    학년 반 

     

    이름 

     

     주제(상징,이미지)

    예시)주먹밥 

     

     디자인 스케치

    디자인 의도, 기념품 설명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5·18기록물은 어떻게 세계기록유산이 되었나요?

     

     

     

     

     한 여학생이 일기를 썼습니다. 1980년 5·18을 기록한 그녀의 일기는 다른 5·18민주화운동 기록물들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개인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일기가 어떻게 세계기록유산이 될 수 있었을까요?

     


     

     

    학생의 일기와 기록의 가치


    여러분은 과거 일을 되돌아볼 때에 무엇을 참고하나요? 최근 일은 기억을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나지만, 오래된 일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막막했던 경험이 있을 겁니다. 이러할 때에 사소한 기록이라도 작성돼 있으면 기억을 되살리는 작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죠. 이처럼 기록은 인간이 과거를 돌아볼 때에 중요한 근거자료가 됩니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기록들이 중요한 자료가 될까요? 정부가 만들어낸 공식 기록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국가폭력이 발생하고 국가 통제와 감시가 심할 때에는 오히려 개인 일상을 펼쳐낸 소소한 기록들이 진실을 찾는 데에 도움을 줍니다.

     

    개인 일기로 역사에 의미 있게 남은 대표적 사례는 ‘안네의 일기’가 있습니다. 안네는 1942년 13살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자신이 처한 삶과 느낌을 솔직하게 썼습니다. 사춘기 소녀의 시점에서 생생하게 기록된 그녀의 일기는 나치 독일의 통치가 유대인들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는 유대인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전쟁 후에 출간 된 그녀의 일기는 전 세계에 번역돼 집단학살과 인권문제를 되돌아보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국내에도 안네의 일기와 비슷한 기록물이 있습니다. 5·18 당시 광주여고 3학년 학생이었던 주소연이 남긴 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그녀는 항쟁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이 목격한 사 실들을 생생하게 일기장에 담았습니다. 침묵을 강요하 던 당시 분위기를 생각하면 1980년 광주 진실을 기록하고 이를 보관하는 행위는 위험 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두려움을 떨치고 훗날 진실을 밝히는 데 필요한 기록 들을 충실히 남겼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흘러 공개된 일기는 5·18의 진실을 찾는 데에 도움을 주며, 2011년 5월 25일 다른 5·18기록물들과 함께 유네스코 인권분야 세 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5·18기록물의 가치

     

    유네스코는 인류 모두의 소유물인 세계기록유산이 미래세대에 전수될 수 있도록 보 전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영국의 ‘대헌장’, 프랑스의 ‘인간과 시 민에 관한 권리 선언’, 앞에서 언급했던 ‘안네 프랑크의 일기’ 등이 세계적으로 유 명한 유네스코 등재 세계기록유산입니다. 우리나라 기록물로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등과 함께 ‘5·18민주화운동 기록물’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 습니다. 다음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5·18민주화운동 자료 목록입니다.

     

     

     자료 목록

     소장 및 관리 대표기관

     국가기관이 생산한 5·18민주화운동 자료

     국가기록원, 광주광역시

     군사법기관 재판자료, 김대중내란음모사건자료

     육군본부

     시민들이 생산한 성명서, 선언문, 취재수첩, 일기

     광주광역시

     흑백필름, 사진

     5·18기념재단

     시민들의 기록과 증언

     5·18기념재단

     피해자들의 병원치료기록

     광주광역시

     국회의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 회의록

     국회 도서관

     국가의 피해자 보상자료

     광주광역시

     미국의 5·18관련 비밀해제 문서

     미국 국무부·국방부

      

     

    이 자료들에는 광주시민을 ‘폭도’로 규정 하였던 정부 측 기록과 함께 시민일기, 성 명서, 기자 취재수첩, 부상당한 시민들의 병원 기록까지 포함되어 있어 5·18을 다방 면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 또한 5·18과 관 련한 국회 회의록과 책임자를 처벌했던 대 법원 재판기록, 피해자들을 위한 보상자료 까지 담고 있어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및 보상과정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편 1993년 광주시민사회가 합의한 ‘광주문제 해결을 위한 5원칙(진상조사, 가해자 처벌, 명예회복, 보상, 기념사업)’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규정을 결정하는 데에 모범 사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5·18민주화운동은 세계 각국 의 인권신장과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기에 유네스코는 5·18기록물을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했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나의 삶을 역사로 남겨볼까요. 어떤 기록물을 토대로 작성하고 싶은가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 중에서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자료 목록을 선정 이유와 함께 작성해 봅시다.

      

     나의 역사 기록 활동지

    학년 반 

    이름 

     

    나의 역사 기록 주제 

    예시) 00학년도 수학여행 탐방기 

      나의 역사 기록물 목록

     번호

    자료 내용 

    자료 유형 

    선정 이유 

     1

     예시) 00년 4월 16일 일기장

     기록물

    수학여행 당시 내 생각이 잘 드러나 있음 

     2

     예시) 수학여행 단체 사진

    사진 

     같이 간 친구들 얼굴이 기록되어 있음

     3

     

     

     

     4

     

     

     

     5

     

     

     

     6

     

     

     

     7

     

     

     

     8

     

     

     

     9

     

     

     

     10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5·18단체들은 왜 세월호유가족을 격려했을까요?

     

     

    예전에 뉴스에서 팽목항에 걸린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라는 플래카드를 봤어요. 5·18과 세월호 사건은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5·18단체들은 왜 세월호유가족을 격려했을 까요?

     

     


    저건 광주잖아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 이었다.” 

    <한강의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2009년 서울 용산에서는 ‘뉴 타운’이라는 이름으로 재개발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이때에 사업 추진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빌딩 옥상에서 농성했습니다. 경찰특공대가 이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농성 중이던 철거민 5명과 경찰관 1명이 숨지고, 24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고립된 빌딩 위 사람들을 공권력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을 보면서 작가 한강은 5·18민주화운동을 떠올렸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아픈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 로, 서로 공감하고 돕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요. 병에 걸리면 아프다는 건 모두 압니 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직접 겪는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알기 힘듭니 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국가권력 혹은 그 권력을 차지하고 있던 세력에 의해 장기 간 탄압을 받았습니다. 5·18만 하더라도 ‘광주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까 지 무려 20여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5·18정신을 폄훼했던 세력에 의해 유가족들은 상처도 많이 받았고 국가가 했던 부당한 일들 때문에 억울함도 가슴 가득 쌓였습니다.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종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말이 없대이”

     

     

    1987년 경찰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스물두 살 대학생 박종철의 아버지가 아들을 떠나보내 며 했던 넋두리입니다. 당시 박종철 죽음을 책 임져야 했던 치안본부는 고문 사실을 숨기려고 ‘탁하고 책상을 치니 억하고 죽었다’라 고 발표해 국민들 분노를 샀고, 이는 시민들이 6월 민주항쟁으로 힘을 모으는 데에 중 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원통하고 화가 났을 그의 아버지는 왜 ‘아무 할 말이 없다’라고 했을까요?

    + 치안본부: 현재의 경찰청

     

    표현의 자유는 모든 권리 주장의 출발점입니다. 그런데 국민 권리를 지켜주고 부당한 현실을 바로잡아주어야 할 국가권력이 그 권리를 짓밟고 폭력을 행사한 주체라면 국민 은 어떤 생각이 들까요? 피해를 당한 사람은 포기하며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말할 힘도 의욕도’ 없을뿐더러 나로 인해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미칠 피해가 두렵기 때문이죠. 박종철의 아버지도 아마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청문회하기 전까지 진짜 7, 8년딱 입을 다물고 살았죠.”

     


    5·18참여자가 광주 청문회가 열릴 당시에 했던 고백입니다. 또 다른 피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오랜 기간 침묵하고 있다가 청문회가 시작되자 겨우 입을 열 정도로 전두환 체제하에서 수많은 국민은 국가 공권력에 억눌려 있었습니다.


    개인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공권력은 국민 전체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공권력은 견제하지 않거나 침묵하는 사람이 많으면, 쉽게 권력을 가진 사람만을 위해 작동됩니다. 2009년 용산참사나 2014년 세월호 사건도 큰 틀에서 보면 5·18민주화운동과 같이 공권력이 제 역할을 하지 않아 발생한 사건들입니다.

     

     

    ‘말’이 차별의 현실과 만날 때

     

    사람들이 함부로 하는 ‘말’로 인해 5·18유가족들과 세월호유가족들은 괴로워했습니다. 일부에서는 5·18 사진들을 희화화하며 유가족을 조롱하거나 저항했던 시민들을 ‘북한에서 온 폭도들’이라고 거짓말을 퍼뜨렸습니다. 세월호유가족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바로 옆에서 폭식하며 조롱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본인과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타인을 격렬하게 비하하고 반인륜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 과연 ‘표현의 자유’일까요? 우리 사회가 이들의 행동을 가볍게 여기고 문제 삼지 않는다면 누군가에게 전해지는 수치심과 모욕감, 두려움 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차별은 더 심해질 것입니다.


    5·18을 조롱하는 세력에 대하여 현재 5·18기념재단과 유가족들은 법적 대응을 통해 바로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적 규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연대하면서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여 혐오발언과 행동을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아픔을 공감합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아들(문재학)을 잃은 김길자 어머니는 5·18묘역을 찾은 단원고 희생 학생 어머니 손을 꼭 붙잡았습니다. 이미 공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고등학생 아들을 잃었던 엄마로서 세월호유가족 고통을 가슴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매년 5월 17일 저녁무렵 광주 금남로에서는 5·18전야제가 열립니다. 2017년 제37주년 전야제 행사 때에는 다른 해와는 다르게 5·18유가족 어머니들이 대형 조각보를 펼쳐들고 거리 행진을 했습니다. 조각보는 세월호 유가족과 5·18유가족이 공동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두 사건이 비록 시기와 장소는 달랐지만, ‘기억의 연대’를 통해 치유와 상생의 길을 걸을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01. 다음 제시문 속의 밑줄 친 사례에 해당하는 친구가 주변에 있다면, 나는 그의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부당한 상황에서 피해를 입고 있지만 조용하게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가 주변 사람 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정말 괜찮아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피해 사실을 말하며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힘이 없는 소수자 입장이어서 침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해결되지도 않을거야.
    일이 커지면 친구들이 나를 원망할거야.

     

     

     

     

     


    02. 다음 제시문을 읽고 물음에 답해봅시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발발하여 보스니아의 이슬람 여성에게 가해진 조직적 인 성폭력이 국제 여론의 주목을 받으면서 동아시아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가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사람들로 하여금 제2차 세계대전으 로 거슬로 올라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과 고난에 격렬하게 공감하도록 만들었다. 폭력이 가해지던 당시에는 결코 만난 적이 없던 피해자들이 이렇게 전후 의 기억 속에서 만나 공감과 연대의 네트워크를 결성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현실 속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던 개별적 행위자들이 기억의 연대를 도모하게 된 것이다.

    <임지현, 『기억전쟁』(2019)에서>

     


    1) ‘기억의 연대’란 무엇일까요?

     

     

     

    2) 5·18민주화운동를 통해 기억의 연대를 할 수 있는 다른 나라 사건은 무엇이 있을까요?

     

     

     

    3) 다른 나라 민주화 단체와 연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지금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1980년이면 40년도 더 된 옛날이잖아요. 당시 피해를 입은 분이나 유가족들은 오랜고통에서 벗어나셨나요?

     

     

     


    ‘트라우마’, 온몸이 기억하는 상처

     

    노르웨이 화가 뭉크(1863~1944)의 ‘절규’. 해골바가지 같은 얼굴과 혼돈 속 세상을 나타낸 것 같은 배경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감상하는 내가 불안해지며 귓가에 주인공의 비명이 들려옵니다. 뭉크의 다른 그림 하나를 더 볼까요? ‘죽은 어머니의 아이’입니다. 어머니 죽음에 충격을 받은 아이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폭력으로 인한 죽음을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은 대부분 그로 인한 커다란 공포에 휩싸인 채 평생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또한 죽음을 앞둔 사람보다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이 공포를 더 느낀다고도 합니다.


    극심한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사람이 이후에 그와 유사한 정신적 혼란을 겪는 심리적 반응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흔히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불쑥불쑥 당시에 받았던 충격이 떠오르며 고통을 억제할 수 없으니,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들은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심리적 고통을 평생 짊어지고 삽니다.

     


    5·18참여자, 트라우마로 고통 받는 삶

     

    1980년 5월,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쓰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거나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TV와 신문에서는 5·18을 계속해 서 ‘불순분자의 조종을 받은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광주시민들 은 5·18이 일어난 장소에 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한편 5·18참여자들은 또 다른 피해를 입을 것이 두려워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면 서 대인기피증에 시달리고 본인과 가족이 5·18관 련자라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 렸습니다. 국가권력은 5·18참여자들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사소한 일에도 연행 또는 격리 조치하며 일상적인 사회활동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어버 렸습니다. 그들은 항쟁 당시 입었던 피해와 심리 적 충격, 이후에도 계속된 국가감시와 그로 인한 고립과 죽은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 때 문에 해마다 5월만 되면 불안하고 답답해 했습니다.

     

     


    오월운동을 통한 적극적 저항

     

     

    “우리 아들을 위해 뭔가 해야 될 거 아니냐. 그 때 우리가 깨달은 거예요. 우리가 집 에서 마음 놓고 있을 때에가 아니다. 우리는 싸워야 한다는 것을……”

    <故 김경철의 어머니 인터뷰에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5·18참여자들은 가족들과 함께 용기를 내어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정권 탄압이 무서워 사람들이 침묵할 때에 5·18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친 건 5·18참여자들과 유가족들이었습니다. 이분들 대다수는 5·18 이전에는 평범한 시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보낼 수는 없었기에 마음 굳게 먹고 본인과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던 사람들과 진한 유대감을 나누며 명예회복에 나섰습니다. 이후 갖은 고난과 압박 속에서도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으며, 보상과 기념사업이 진행되었습니다.

     

     

     

    끝나지 않았다, 잊을 수도 없다.

     

    5·18처럼 트라우마가 심한 사건은 보상, 기념사업, 책임자 처벌 등 후속 조치가 완벽하게 취해지지 않는 한 당사자들의 심리적 상처는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 하나로 감옥살이를 했던 분이 지금도 하는 이야기입니다.

     

    “꿈에 항상 군인들이 나타나 살 수가 없습니다 … 축산업에 실패해 엄청난 생활고를 겪고 있고, 고문 후유증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2006년 5·18유공자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중 55.8%가 트라우마 증상을 보이고 있고, 2007년 조사에서는 5·18과 연관된 사망자 381명 가운데 10.4%인 39명이 자살로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는 한국 평균 자살률인 0.02%의 500배 정도 되는 수치입니다. 또한 당사자의 배우자와 자녀들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습니다.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지다, 하지만……

     

    2012년 10월 광주에 트라우마센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국가폭력 피해자 치유기관으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2년이 지나서야 만들어졌습니다. 센터의 책임자는 이곳 이용자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곳을 이용하는 분들은 환자가 아닙니다. 고통을 당했지만 이겨냈고, 살아왔고, 우리사회가 그 혜택을 받아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 분들은 환자가 아닌, 경험을 알려주시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분들입니다.”

    <광주 트라우마센터장 명지원 인터뷰(2019)에서>

     

     

    하지만 아직도 5·18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돌아다니며 치유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에게 제2의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5·18유공자들을 폄훼하고 유가족들을 조롱하며, 시민군들을 북한에서 보낸 간첩이라고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혐오발언과 가짜뉴스들이 사라질 날은 언제일까요?

     

    5·18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5·18을 둘러싼 여러 의혹에 대한 진실 규명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과제입니다. 또한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고, 반인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용납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5·18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또 다른 트라우마를 겪지 않을 것입니다.

     

     

    + 광주트라우마센터 Gwangju Trauma Center / 062-601-1980 / https://tnt.gwangju.go.kr/

        고난의 세월을 견뎌온 국가폭력 생존자분들이 계셔서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살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존경합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01. 다음은 광주 트라우마센터에서 진행하는 ‘마이 데이(MY DAY)’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입니다.

     

     

     마이데이 My Day
    마이데이(My Day)는 국가폭력 생존자와 그 가족이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마음 속 상처를 용기 내어 말하고 참관인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며 지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1) ‘상처를 말하는 것’이 왜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요?

     

     

     

     

    2) 경청하고 공감해서 듣는 것이 왜 위로가 될까요?

     

     

     

     

     

    02. 2005년 UN총회가 채택한 ‘인권침해 피해자 권리장전(반 보벤-바시오우니 원칙)’ 중 일부입니다. 5·18과 관련하여 잘 된 것은 ○, 미흡한 것은 △, 조치되지 않은 것은 X로 표시해봅시다.

     

    1) 피해자 권리장전은 크게 정의에 대한 권리, 피해회복에 대한 권리, 진실에 대한 권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요구되는 조건으로는,

     

      ① 계속적인 침해를 막기 위한 조치 ( )
      ② 사실의 검증과 진실의 완전한 공개 ( )
      ③ 실종자나 납치된 사람들 확인, 죽은 사람 신원 확인, 시신 매장 지원 ( )
      ④ 피해자 명예/권리회복을 위한 공식적인 선언 또는 사법적 결정 ( )
      ⑤ 사실의 인정과 책임의 수용을 포함한 공식적 사과 ( )
      ⑥ 잘못한(위반행위) 책임자에 대한 사법적 행정적 제재 ( )
      ⑦ 피해자에 대한 기념과 헌사 ( )
      ⑧ 국제인권법, 국제인도법 연수와 모든 수준의 교육자료 안에 잘못했던 행위에 대한 정확한 설명 포함 ( )  

     

     

    2) 미흡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조치들 중, 현재 우리 사회에서 5·18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친구들과 이야기해봅시다.

     

     


    03. 다음 제시문과 관련하여 5·18민주화운동으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현재 우리 사회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덴마크의 저항시인이었던 할프단 라스무센은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이라는 시(詩)에 서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고문 가해자도 다시 일어설 수 없이 망가져 버린 육신도 아니라 며,‘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무자비하고 무감각한 세상의 눈먼 냉담함이다’라고 했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역사왜곡,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5·18민주화운동이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임을 이제는 잘 알겠어요. 하지만 아직도 일부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을 깎아내리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역사왜곡을 막을 수 있을까요?

     

     


    역사왜곡과 표현의 자유

     

    역사는 동일한 사건이라도 관점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여러 의견이 나오는 것과 역사적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사료’에 의해서 확정됩니다. 그래서 근거 없이 주장만 하거나 조작된 자 료를 근거로 주장하면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 사료: 역사 연구에 필요한 책이나 유물, 기록 따위를 말함.

     

     

     

    "폭동이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되었습니다.논리적으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라는 것을 밝혀내야 합니다."

     

    "그 주장을 뒷받침 할 근거가 있나요? 근거 없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옳지 않아요." 

     

     


    역사왜곡은 역사적 의미를 폄훼하기 위해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는 시도입니다. 5·18 민주화운동에 담겨 있는 민주주의와 평화, 공동체 정신을 훼손하고 싶은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의 사실관계 자체를 부정하려고 거짓 주장을 되풀이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거짓 주장을 펼쳐놓고도 ‘표현의 자유’라고 주장합니다. 헌법에서 보장하는 자유권을 바탕으로 하는 주장인데, 그렇다고해서 이를 무조건 인정해야 할까 요?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자기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다 른 사람의 명예를 침해하면 명예훼손죄, 모욕죄 등으로 처벌됩니다.

     

    한편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려면, 그 전에 먼저 의견과 사실을 명확히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 일어나는 일’을 의미하고, 의견은 ‘어떤 대상에 대해 가지는 생각’을 뜻합니다. 사실을 왜곡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

     

    역사를 왜곡하는 사례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이 아닙 니다. 과거사 정리가 잘된 나라인 독일에서도 간혹 발생 합니다. 그래서 독일은 역사를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사람 을 처벌하는 법 조항을 1985년에 만들어 놨습니다. 이 법 으로 나치가 저지른 집단학살인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거나 찬양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는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 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에 반인륜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을 처 벌하는 조항을 넣어 놨습니다. 유럽연합 역시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 방지협약’을 체결하여 대량학살,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행위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 범죄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 존엄과 가치를 훼손하고 역사 왜곡을 반복 되게 합니다. 이러한 잘못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을 만들었습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발생했는데, 유럽 여러 나라가 지금 까지 법적으로 처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범죄 에 대한 처벌을 끝까지 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다시는 불행한 과거를 반복하지 않 겠다는 사회적 약속이자 스스로의 다짐입니다.

     

     

    역사왜곡 및 부정에 대응하는 자세


    우리나라도 유럽처럼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과 같은 법률을 만들어 역사왜곡과 부 정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법률로 통제한 다고 해서 완벽하게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과 언론, 국가가 역사왜곡 및 부정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야합니다.


    5·18왜곡에 대한 대처방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시민들은 언론이나 단체가 왜곡 된 사실을 유포하면 비판 적 시각으로 문제점을 지 적하며 바로 잡아야 합 니다. 또 피해자의 아픔 을 공감하며 민주화를 위 한 그들의 노력을 존중하 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 다. 언론은 대중에게 영 향력을 크게 미치기에 객 관적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제공할 사회적 책임이 있습니다. 국가는 우리 나라 민주화 역사가 제대로 정립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합니다.

     

    역사왜곡이나 부정이 자행되는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 사실이 명명백백하게 세상에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으면 역사왜곡은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 다. 이런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정확한 조사와 진실 규명 및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비판적 시민의식을 기르고 가질 수 있도 록 교육여건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이런 노력들이 함께 이뤄지면 분명 역사왜곡과 부 정은 우리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것입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다음 제시문을 살펴서 생각을 열어봅시다.

     
    유럽의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 내용

     

     국가

     법령

     주요 내용

     독일

     형법 제130조 제3항
    (1985)

     국가사회주의(나치) 지배하에서 저질 러진 집단학살을 찬양·부인·경시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형 또는 벌금형

     오스트리아

     나치 금지법
    (1947)

     나치조직 설립 부활 기도 10년 이상 20년 이하 징역형. 반인륜 범죄 등을 인쇄물·방송 등에서 배포한 자는 5년 이상 10년 이하 징역형

     프랑스

     인종주의, 반유대주의 외국인혐오 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1990·일명 게소법)

     출판자유법 24조 1항에 의해 런던협 정(1945)에 규정된 반인륜 범죄 존재 에 이의제기하는 자는 1년의 구금형과 4만5천유로 이하 벌금형

     유럽연합

     인종주의, 외국인혐오 행위 방지협약 (1996)

     대량학살, 잔혹한 범죄, 전쟁범죄 부인 하거나 심각하게 축소하는 행위 최대 3년 징역형 처벌 가능



     

    01. 유럽 각국에서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이 만들어진 배경을 찾아봅시다.

     

     

     

     

    02.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한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률 제정에 대한 찬반 입장을 들어본 뒤 각자가 주장하는 근거를 바탕으로 토론해 봅시다.


    찬성 근거
    - 역사왜곡은 희생자의 인권을 침해하는 범죄이다.

    -

    -

     

    반대 근거
    - 처벌하는 행위의 범위를 명확하게 설정하기 어렵다. 

    -

    -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북한군이 광주에 왔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요?

     

     

    일부 사람들은 지금도 5·18민주화운동에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5·18유공자에게만 과도한 혜택을 주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사실인가요?

     

     

     

     

     

    5·18은 북한군의 소행?

     

    5·18을 부정하는 일부 사람들은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을 광주시민이 아닌 북한군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600여명의 북한 특수부대원이 광주로 내려와 시민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켰고, 광주시민들은 선동에 휘말렸을 뿐 자발적으로 시위대를 구성하지 않았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터넷에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들을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누가 저런가짜뉴스를왜 퍼트리는 걸까?

     

    그런데 이 주장은 사실일까요? 일부 언론 및 단 체 혹은 개인들의 이러한 주장에 국방부는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진상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5·18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개입했다는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라고 공식입장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유언비어는 계속 만들어져 유포되 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유신정권이 무너진 혼란을 틈타 전두환과 신군 부세력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습니 다. 이에 항거해 전국에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그 상징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5·18민주화운동입 니다. 이 항쟁의 의미를 훼손하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왜곡하고 싶은 사람들이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은 70~80년대 군사 독재 정부의 정당성 을 주장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리 행동할 겁니다.

     

     

     

    5·18유공자에게만 과도한 보상을?

     

    5·18유공자들이 다른 국가 유공자와 달리 과도한 보상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6·25전쟁 참전유공자보다 5·18유공자가 월등하게 많은 보상금과 연금을 받는다는 내용이지요. 또한 여기에는 ‘5·18유공자의 자녀가 취직시험에서 10% 가산 점을 받고 있어 과잉이다’라는 내용도 포함됩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16년까지 5·18유공자 5,801명에게 1인당 평균 4,300만원 정도 보상금이 일시금으로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5·18유공자에게 연금을 제공하는 제 도는 없고요. 4,300만원은 2019년 최저임금으로 계산해 보면, 직장에 갓 들어간 젊은 이의 2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국가폭력으로 인해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입고 그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못한 채 수 십년을 살아온 피해자들에게 이 금액이 과연 과도한 보상일까요?

     

    한편 5·18유공자 자녀들의 취직 활동 때 부여되는 가산점은 5%입니다. 이는 독립유공자, 특수임무유공자의 가족들이 받는 혜택과 동일한 점수입니다. 2017년 기준으로 각종 국가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아 취업한 5·18유공자 및 그 가족은 총 391명입니다. 이 숫자는 가산점 혜택으로 취업한 전체 국가유공자 및 가족의 1.2%에 해당합니다. 어때요? 그들의 말대로 5·18유공자에게만 특별혜택이 주어졌나요?

     

    모든 국가유공자는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률을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5·18유공자라고 해서 다른 유공자에 비해 특별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5·18유공자에게만 과도한 보상을 해준다는 왜곡된 주장이 나오는 이유는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공자들을 분열시키고 국민과 편을 가르려는 행위입니다.

     

     

     

    5·18유공자 중 폭도나 가짜 유공자가 있다?

     

    한편 일부 단체나 사람들은 ‘5·18유공자 중에 폭도나 가짜 유공자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일부 정치인이 동조하고 있고요. 이들은 5·18유공자 선정기준과 절차가 투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하면서 북한군 개입여부 또한 밝혀야 하기에 5·18유공자 명단은 공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5·18유공자는 ‘5·18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구성된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심사를 거쳐 결정된 후에 국가보훈처의 2차 심의를 거쳐 최종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절차에 따라 유공자로 지정되다 보니, 5·18 당시 행방불명되었지만 시신을 찾지 못해 증거불충분으로 유공자가 되지 못한 안타까운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북한군 개입여부를 규명하기 위해 5·18유공자 명단을 공개하라는 주장도 억지입니다.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를 제외한 국가유공자의 명단은 공개하지 않는다’며 이를 여러 번 공개적으로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명단 공개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법원에 명단을 공개해달라는 소송까지 제기했습니다. 법원은 ‘유공자의 명단공개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유공자의 명예와 사생활을 보호하는 이익보다 크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주장이든지 본인의 입장을 공개적으로 펼치려면 확인된 사실을 밑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본인 혹은 사설 단체의 이익을 위해 왜곡된 사실을 무작정 퍼트리는 것은 결코 우리 사회발전에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사실을 전제로 한 주장이 바른 여론을 조성해 나가는 기본 조건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겠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다음 대화를 보며 생각을 열어 봅시다.


    "헬기 공중사격이 있었다는 시민들의 증언이 있어."

     

    "하지만 신군부에 가담한 사람들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하잖아. 무엇이 진실일까?"

     

     

     

    01. 아래 글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이 진실인지 왜곡인지 자료를 수집하여 판단하고 그 근거를 제시해 봅시다.

     

     헬기 기총소사 주장은 헬리콥터의 기체 성능이나 특성을 잘 몰라서 하는 얘기 이거나, 아니면 계엄군의 진압활동을 고의적으로 왜곡하려는 사람들의 악의적 인 주장일 뿐이다. 그가 제시한 사진도 가짜였다. 목사라는 사람이 무슨 이유로 가짜 사진까지 가져와서 허위진술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목사 가 아니라 가면을 쓴 사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전두환 회고록에서>

     

     
    02.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사례를 5·18기념재단 홈페이지(www.518.org) 에서 찾아 사실에 기반을 둔 글로 바꾸어 봅시다.
    * 검색 방법 :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 주요사업 ⇒ 진상규명·왜곡대응

     

     

     왜곡된 부분

    바로 잡기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5·18은 우리나라 민주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요?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5·18민주화운동이 오늘날 민주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해주셨어요.

    5·18민주화운동 이후에도 군사정권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왜 선생님은 5·18민주화운동의 영향과 의미를 높이 평가할까요?

     

     


    감출 수 없는 진실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이후 전두환의 권력은 더욱 강력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대거 체포하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후 대통령에 취임했습니다. 정권의 등장에 방해가 되었던 5·18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모든 언론을 통제하며 5·18민주화운동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기억되기를 원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이 끝난 이후에도 수백 명의 광주시민은 국가기관에 끌려가 고문과 구타를 당했습니다. 5·18유가족들은 진상 규명 요구도, 망월묘지에서 추모식을 여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감추기에 5·18민주화운동은 너무 큰 사건이었습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고 외신에 의해 사건 진상이 세계 곳곳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아아, 우리들의 피와 살덩이를
    삼키고 불어오는 바람이여
    속절없는 세월의 흐름이여
    아아,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구나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가
    넋을 잃고, 밥그릇조차 대하기
    어렵구나 무서웁구나
    무서워 어쩌지도 못하구나


     

    위 시는 김준태 시인이 1980년에 창작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의 일 부 내용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을 최초로 다룬 문학작품이죠. 5·18이후 민주화운동 에 나섰던 사람들은 시의 내용처럼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나였더라면 그들처럼 저항할 수 있었을까?”, “진실을 알고도 외면해야만 하는가?”와 같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자신에게 던졌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광주의 진실을 규명하는 데에 더 힘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매년 5월이면 전국에서 5·18민주화운동을 추모 하고 진상 규명을 요구하 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광 주를 찾았습니다. 광주뿐 만 아니라 전국의 주요 도 시에서도 추모식과 시위 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정부는 군사정권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5·18 추모 행사 를 강력하게 탄압했습니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더욱 끈질기게 추모 행사를 열며 정부 에 항의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큰 부분은 ‘광주 알리기’”였다고.

     

     


    한국 민주화의 밑거름이 된 5·18민주화운동

     

    광주의 민주화 요구를 군홧발로 짓밟은 전두환 정권은 사회 각 부문에서 민주화 열 망이 불타오르자 강력한 탄압으로 잠재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고문치사와 같은 각종 인권유린 행위가 드러나게 되었고, 이는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으로 이어 졌습니다. 6월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군사정권의 강압정치를 더는 참지 못하고 대통 령을 국민이 직접 뽑는 ‘직선제’로 헌법을 바꾸자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민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5·18 때처럼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로 진압할 수 없었습니다. 더 큰 저항을 불러와 자기 정권에 부담이 된다는 것을 5·18 민주화운동을 통해서 알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월 민주항쟁의 요구사 항인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우리 사회는 점차 민주화를 이 루어왔고 오늘날과 같은 민주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01. 다음은 5·18 진실 규명과 독재 정권 타도를 위해 힘쓰다 목숨을 잃은 열사들의 명단입니다.

          친구들과 함께 인물카드를 만들어봅시다.

     

    김태훈  박관현  박래전  조성만  표정두  홍기일

     

     

     역사인물카드

     이름:

     

     생년월일:

     인물설명

     

     

     

     

     


    02. 다음은 2016년 촛불집회에 대한 기사입니다.

         내용을 읽고 5·18민주화운동과 2016년 촛불집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이야기 나눠봅시다.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어제(26일) 촛불집회를 외국 언론들도 잇따라 주요 뉴스로 보도했다. (2016년 11월 16일) AP통신은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집회 참석 인원이 “수십년 만에 가장 큰 시위 물결”이라고 보고했고, 로이터통신과 블룸버그통신도 “1987년 민주화 항쟁 이래 최대”,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 집회 가운데 하나”라고 전했다.
     - KBS News 11월 27일 보도 -

     

     

    ▲ 공통점 :

     

     

    차이점 :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광주사태’는 어떻게 ‘민주화운동’이 되었나요?

     

    역사용어는 비슷한 사건인데도 평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고 같은 사건도 때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것 같아요. 5·18도 처음에는 ‘광주사태’ 라고 불렀다던데 지금은 왜 ‘5·18민주화운동’이라 하나요?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

     

    민주주의를 지키려던 시민들의 항쟁은 많은 희생을 남긴 채 종료되었습니다. 5·18은 열흘간의 항쟁으로 끝이 난 듯 보였지만, 이후 민주화를 위한 투쟁이 계속되면서 오히 려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5·18을 진압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은 5·18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음을 언론 에 흘리면서 안보위기를 만들어 국민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다음은 전두환 정권 당시 통일부장관이 통일연수에 참가한 대학생들에게 했던 강연의 일부입니다.

     

     

    “북한은 우리 사회의 변화기를 이용, 분열과 혼란을 획책하여 제2, 제3의 광주 사태 를 조성하는 베트남식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북한으로부 터의 위협과 국가적, 국제적 자유주의라는 두 개의 도전을 극복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우리 사회 내에 만연된 각종 병폐를 척결하여 새 질서, 새 체제를 창출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처해 있다.”

    〈동아일보(1980.8.11.)에서>

     


    이 내용만 보면 마치 북한이 5·18의 배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5·18을 직접 경험 하거나 그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겠지만, 사건에 대한 정 확한 정보가 없는 사람에게는 사실처럼 전달되었을 겁니다.

     

    이처럼 전두환 정권과 언론을 통해 만들어진 5·18에 대한 왜곡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980년대에 무엇보다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모든 국민이 알 수 있도 록 5·18의 진상을 밝히는 일이었습니다.
    진실 규명을 위한 노력, 이른바 ‘오월운동’은 항쟁 기간에 가족을 잃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로부터 시 작되었습니다. 이들은 희생자들이 잠들어있는 망월 묘지에서 매년 5월 추도식을 열고 정부에 진실을 밝 혀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종교계도 천주교를 중심으 로 5·18 사진전을 개최하고 「오, 광주」, 「오월, 그 날이 다시 오면」과 같은 비디오를 상영하며 진실 규 명에 힘을 보탰습니다. 또한 대학생들도 매년 5월이 되면 집회와 시위를 하며 오월 진상 규명을 지속적 으로 요구했습니다.


    한편 5·18의 진실을 찾기 위한 오월운동이 전개되는 와중에 안타까운 희생도 발생했습니다. 김종태, 김태훈, 홍기일, 표정두와 같은 청년들이 진실 규명을 요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으로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박관현도 감옥에서 5·18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던 중 사망했습니다. 왜 젊은이들은 귀중한 생명을 스스로 던져가며 5·18 진실 규명을 요구했을까요? 그것은 5·18을 민주화운동이 아닌 폭동으로, 북한군이 개입한 사건으로 왜곡하고 있던 전두환 정권에 던지는 정의로운 외침이었습니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 되기까지


    이런 노력이 모여 1988년 ‘광주청문회’가 국회에서 열렸습니다.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되었던 청문회는 국민들이 5·18 진상을 알게 한 전환점이 됐습니다. 그러나 청문회는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명령한 책임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고 그들에 대한 법적 처벌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후 1992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더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배상, 명예회복, 정신계승을 위한 기념사업이라는 ‘광주문제 해결 5원칙’이 1993년 만들어졌습니다. 이 원칙 중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1994년에 5·18기념재단이 만들어졌고, 5·18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시민 사회단체의 노력도 본격화되었습니다.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위한 고소와 고발이 이어지며 검찰도 수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당시 검찰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사법기관이 당시의 일련의 정치적 사건에 대해 위법 여부를 판단할 경우, 헌정 질서와 법질서의 단절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고, 정치·사회·법률적으로 중대한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이를 두고 언론에서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습니다.

    검찰 발표에 반발한 시민들은 ‘5·18특별법’을 만들어 책임자를 처벌하자는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는 국민들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왔습니다.

    1995년 10월에 전두환, 노태우가 비자금을 불법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의 영향으로 김영삼 정부는 더는 특별법 제정을 미룰 수 없었습니다.

     

    마침내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전두환과 노태우는 재판을 통해 법적 처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12·12사건은 명백한 군사반란이었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였다고 최종판결을 내렸습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라는 검찰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증명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1997년에는 5·18을 국가기념일로 정해 5·18민주화운동을 정부가 주관하여 기념하게 되었습니다. 또 2002년에는 1997년 만들어진 망월동 신묘역이 국립묘지로 승격되어 ‘국립5·18민주묘지’가 되었고, 5·18 관련자들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광주사태’로 불리던 5·18은 많은 시민과 사회·종교 단체의 노력으로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으면서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한편 5·18 진상 규명을 위한 다양한 노력이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포 책임자, 민간인 학살, 북한군 침투조작 사건’과 같은 과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이들 과제를 풀기 위해 2018년에는 ‘5·18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5·18의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이는 다른 역사적 사건의 진상 규명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보다 앞선 사건이지만 아직도 제 이름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제주4·3사건’, ‘여수·순천10·19사건’, 강원도의 ‘사북사건’ 등이 진상 규명과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5·18이 ‘사태’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바꿈되는 과정에서 보여줬던 시민들의 연대와 공감이 더 필요합니다.

     

     

     

    생각을 넓혀 가요

     

    한 사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지 않았을 때에는 제대로 된 평가를 하는 것이 어렵고 적절 한 이름을 붙이기도 힘듭니다. 5·18도 처음에는 ‘폭동’, ‘광주사태’로 불리다가 시민들 노 력으로 ‘5·18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래 용어의 의미를 알아보고 모둠별 로 역사에서 적용할 수 있는 사례를 찾아 발표해 봅시다.

     

     

     

     

    쿠데타(정변)

    - 쿠데타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비합법적인 방법(무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는 것을 말한다. 혁명이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의 교체라면, 쿠데 타는 지배 세력간의 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혁명과는 달리 민중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적용 사례:

     

     

     ▶ 사례의 주요내용:

     

     

     

     

     

     

     

     혁명
    - 권력의 교체라는 점에서 쿠데타와 동 일하지만, 혁명은 단순한 정권교체를 넘어 정치조직, 사회구조, 경제질서 등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뜻한다.

     

     적용 사례:


     ▶ 사례의 주요내용:

     

     

     

     사태
    - 사태의 사전적 의미는 ‘벌어진 일의 상태나 일이 되어가는 형편’을 뜻한 다. 어떤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상황 이 강조될 때에 주로 쓰인다.

     

     적용 사례: 


     ▶ 사례의 주요내용:

     

     

     

     

     의거
    - 정의를 위해 개인이나 집단이 의로 운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전두환 정 권이 5·18의 의미를 깎아내리기 위 해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쓸 때에, 5·18 관련 단체들은 ‘광주의거’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 적용 사례:


     ▶ 사례의 주요내용:

     

     

     

     

     

    항쟁
    - ‘상대에 맞서 싸운다’라는 뜻으로, 주로 피지배층이 부당한 지배층을 상대 로 투쟁할 때에 사용한다.

     

     

     적용 사례:

     

     ▶ 사례의 주요내용:

     

     

     

     

     

    운동
    - 사회를 개혁하려는 목적으로 단체나 집단이 벌이는 적극적인 활동을 의미 한다. 일시적, 일회적 사건이 아닌 비 교적 장기적 흐름을 보이는 사건에 붙는 용어이기도 하다.  

     

     ▶ 적용 사례:


     ▶ 사례의 주요내용: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 ‘님을 위한 행진곡’은 어떻게 5·18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나요?

     

     


    얼마 전 5·18기념식에 참석한 대통령이 “‘님을 위한 행진곡’은 5·18민주화운동 정신 그 자체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어요. 노래를 들어보면 광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던데, 어떻게 해서 이 노래가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게 되었나요?

     

     

     


    들불야학 설립을 주도한 박기순

     

    가사에 5·18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게 된 것은 노래에 얽힌 인물들 때문입니다. 1970년대 한국은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고통을 받으며 일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전남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박기순은 노동자들의 이런 현실에 관심을 갖고 있던 학생으로, 이들을 도울 방법으로 야학을 생각했습니다. ‘야학’이 뭐냐고요? 청소년 노동자나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성인을 대상으로 야간에 수업을 하는 비인가 학교를 말합니다.


    1978년 7월 박기순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들불야학’을 열었습니다. 이 야학에 입학한 젊은 노동자들은 주경야독하면서 사회참여 의식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기순은 야학을 개설한 지 5개월 만인 그 해 12월,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들불야학과 5·18민주화운동


    박기순은 사망했지만, 들불야학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녀의 권유로 야학 교사가 되었던 윤상원이 다른 교사들과 함께 야학을 이끌었습니다. 사회의식이 뚜렷했던 들불야학 구성원은 5·18민주화운동이 발생하자 누구보다 앞장서서 부당한 권력에 맞섰습니다.

     

    5·18 당시 이들의 활약은 지금 생각해도 대단했습니다. 언론들이 왜곡 보도를 일삼자 윤상원과 박용준은 들불야학 사무실에서 ‘투사회보’를 만들어 광주의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렸습니다. 또한 윤상원은 항쟁 지도부에서 대변인을 맡아 활동하다가 27일 전남도청이 점령당할 때에 현장에서 사망했으며, 박용준도 끝까지 저항하다가 생을 마쳤습니다.

     

    김영철과 박효선 역시 항쟁 지도부의 기획실장과 홍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박관현과 신영일은 5·18민주화운동 이후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진상규명을 위해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을 했습니다. 들불야학에서 배운 학생들의 열정도 대단했습니다. 투사회보의 인쇄와 보급을 돕고 시민군으로 활동 하며 계엄군의 부당한 폭력에 맞서 싸웠습니다.

     

     

    + 광주 5·18자유공원에 세워진 들불 7열사 기념비를 찾아보세요.

     

     

     

    ‘님을 위한 행진곡’이 만들어지다.


    1982년 4월, 5·18민주화운동 2주년이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소설가 황석영은 당시 전남대학교 학생 김종률 등 광주지역 노래패 15명과 함께 <넋풀이-빛의 결혼식>이란 노래극을 만들었습니다. 전남도청을 끝까지 지키다가 운명한 윤상원과 노동운동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추모하며 5·18을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 노래극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합창으로 쓰기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가사는 황석영이 시민사회운동가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내용 일부를 빌려와 지었고, 작곡은 김종률이 했습니다. 이후 노래는 5·18민주화운동 유족들이 추모제 때마다 부르며 민주화 시위 현장의 대표적 ‘민중가요’로 빠르게 확산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2년 월드컵 당시에는 응원단의 공식 응원가 중 한 곡으로 지정돼 세계인들의 축제인 월드컵 경기장에서도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또한 1997년부터는 정부가 주관하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도 모든 사람이 노래를 함께 부르며 5·18을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 잡았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논란들
     
    이런 노래가 2009년부터는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모두가 함께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행사를 주관한 국가보훈처가 참석자 모두 함께 부르는 제창을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노래는 이미 5·18을 상징하는 곡이 되어 있었기에 5·18 관련 단체와 시민들은 반발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국가보훈처는 유족들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래 제창을 중단시켰습니다.


    그런데 국가보훈처는 왜 ‘님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막았을까요? 그들의 공식 입장은 “‘님을 위한 행진곡’이 북한의 선전영화에 사용되고 있으며, 노래 가사 속의 ‘님’과 ‘새 날’의 의미에 대한 논란이 있어 노래 제창을 제외하였다”였습니다. ‘님’은 김일성을, ‘새 날’은 북한이 바라는 세상을 뜻한다는 일부 극우 단체의 주장을 아무 여과 없이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북한에서는 저항정신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이 노래가 금지곡으로 지정돼 있다고 하니, 국가보훈처의 이 주장은 참으로 옹색한 변명일 뿐이었습니다. 또 북한 찬양 논란이 있다고 하면서도 5·18기념식장에서 합창단이 부르는 것은 허용했으니, 보훈처의 주장은 모순투성이었습니다.  

     

    이 논란은 무려 9년을 끌다가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로소 해결되었습니다. 이 해 5·18기념식장에서는 ‘님을 위한 행진곡’을 참석자 모두가 함께 불렀으며 지금까지도 매년 제창되고 있습니다.

     

    님을 위한 행진곡! 노래가 만들어지고 불러진 사연들을 살펴보니 더 애착이 가지 않나요?

     

     

     

    생각을 넓혀가요


    다음은 ‘님을 위한 행진곡’ 가사입니다. 노랫말을 보며 생각을 열어 봅시다.

     

     

     

     

     

     

    님을 위한 행진곡

     

      시: 백기완

      곡: 김종률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동기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자여 따르라

     

     

     

    + 님을 위한  행진곡 자세히 알아보기

     

     


    01. 1980~90년대 시위 현장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을 많이 부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02. ‘님을 위한 행진곡’을 토대로 노래극을 만들어 공연해 봅시다.

     

      1) 노래극을 구성할 요소에 대해 친구들과 토의해봅시다.

     

     고려할 사항

     토의내용

     관객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장면은?

     

     중심사건은 무엇으로?

     

     등장인물은?

     

     극 반전을 줄 수 있는 요소는?

     

     결말은?

     

     기타 

     

     

      2) 위에서 논의한 내용을 간단하게 줄거리로 정리해 봅시다. 

     

     

     

     

     

     

     

     

     

      - 출처: 5‧18민주화운동 고등학교 인정교과서 / 사용승인(광주광역시교육감 인정-15-광주-63-고교-21-001, 20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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