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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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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배경

5‧18민주화운동은 군부독재로 얼룩진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장에서는 1979년 10월 26일에 발생한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 1979년 12월 12일의 군부쿠데타, 그리고 1980년 5월 17일까지 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이어지는 역사적 격동기가 5‧18민주화운동과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1. 유신체제의 붕괴

  • 가. 정치적 배경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심복인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저격당하면서 유신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박정희 대통령 피살사건은 기본적으로 군부독재 집단과 국민 사이의 대립 관계가 반영된 정치적 돌발사태였다. 유신체제는 안보라는 미명 아래 언론·출판·집회·결사·사상·양심의 자유 등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인 국민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억압한 전형적인 군사독재 체제였다. 또한 고도성장 과정에서 도농 간 불균형 발전과 경제적 불평등이 심해지면서 국민들이 겪어야 했던 생활상의 고통도 매우 컸다.

  유신체제가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는 뚜렷한 징후는 1978년 12월 12일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잘 나타났다. 이 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엄청난 규모의 금권과 관권을 동원하고서도 유효표의 31.7%를 득표한 반면에 야당인 신민당은 그보다 1.1%가 많은 32.8%를 획득했으며 통일당이 7.4%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제10대 총선의 충격으로 유신정권은 유화책을 쓸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 결과 김대중 전 신민당 대통령후보가 1978년 12월 27일 형집행 면제로 석방되었다. 1979년 5월 29일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정치적으로 묘한 대립관계에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연합하여 지도부로 나섬으로써 국민들에게 정권 교체의 큰 희망을 심어줬고, 결과적으로 유신정권은 심각한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됐다.
  • 나. YH 무역회사 여성 노동자 농성과 야당 탄압
  한 시대의 대격변을 예고하는 단초는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에서 시작됐다. 1979년 8월 9일 오전, 신민당의 당사 4층 강당에서는 봉제업체인 YH무역주식회사의 여성노동자 200여명이 기업주의 폐업에 반발하여 폐업조치 철회 농성을 벌였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인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기 위해 신민당이 당사 건물을 내준 것이다. 그러나 유신정권은 상식을 초월하는 엄청난 폭력을 동원하여 농성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한 노동 탄압 사건을 넘어선 야당에 대한 정치 탄압 사건으로 발전하였다.

  이날 경찰은 1000여명의 진압대원을 신민당사로 난입시켜 농성을 하고 있던 174명의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밖으로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노동조합 간부인 김경숙 씨가 창문으로 뛰어내려 중태에 빠졌고 결국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또한 경찰은 총재실 문을 부수고 들어가 김영삼 총재와 당 간부들을 끌어내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기도 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이 노동자 농성 사건을 빌미로 신민당 분열공작을 시도하였다. 유신정권과 비밀리에 결탁한 신민당 원외지구당 위원장 3명이 ‘신민당 김영삼 총재와 부총재 전원의 직무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접수시켰다. 그리고 법원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신민당 총재단의 직무 집행을 정지시키고 박정희 정권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인물을 총재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결정을 내렸다. 당원들이 뽑은 대표를 사법부가 독재정권이 내세운 인물로 강제로 바꿔버린 것이다.

  아울러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 씨의 동교동 자택을 전면 봉쇄하였고, 미국의 지미 카터 행정부에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원을 끊으라고 요구한 김영삼 총재의 『뉴욕타임즈』 회견내용을 “반헌정적, 반민족적 작태”로 몰아서 국회에 징계 동의안을 제출했다. 10월 4일 오후 공화당과 유신정우회 의원 159명은 여당 총회장에서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제명 결의안을 기습적으로 처리해 버렸다.

  노사분규 사태로 시작된 사건이 제1야당 당수의 의원직 제명으로 확대된 일련의 비정상적 정치적 사태를 지켜본 국민들 사이에서는 유신체제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그 동안 다소 주춤하던 대학가에 반유신 반독재 운동의 열기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 다. 부산‧마산 민주항쟁
  10월 16일 오전 10시, 부산대학교 도서관 앞에서 일단의 학생들이 ‘유신철폐’,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내에서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 시위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로 발전하였고, 이 열기에 고무된 학생들은 교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하여 부산 시내로 진출하였다. 부산시민들은 이 시위에 열렬한 환호를 보냈으며 수많은 시민들이 동참하면서 부산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독재정권의 인권 탄압의 상징인 경찰서가 시위대의 습격을 받는 등 사태가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게 되었다.

  10월 17일 부산대에 휴교령이 내리자 이번에는 동아대 학생들이 가두로 진출하여 시위에 합류하였고 18일 0시를 기하여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된다는 발표에도 불구하고 도심으로 진출한 시민·학생 시위대는 “유신철폐, 독재타도”와 함께 “계엄철폐”를 외치며 밤늦게까지 시위를 하였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정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에 나섰다. 여기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나중에 광주에 투입된 3공수부대였다.

  10월 18일 아침, 4·19혁명의 도화선이었던 마산에서 경남대생 1,000여명이 휴교령을 무릅쓰고 교내시위를 벌인 뒤 오후 5시경 마산 시내로 진출했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시위대는 수 만 명으로 불어났고, 병력을 추가 투입하여 시위진압에 나섰으나 시위는 새벽 2시까지 계속되었다. 다음날인 19일에도 시위가 이어지자 19일 저녁 1,500여 명의 무장군인이 마산 시내에 투입되고 20일부터는 마산·창원지역에 ‘위수령’이 발동됨으로써 4일간의 “부산·마산민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 4일간의 “부산·마산민주항쟁”으로 체포된 사람은 모두 1,563명이었는데 이중 500여명은 학생이었고 나머지는 노동자, 노점상, 봉급생활자 등 일반시민이었다.
  • 라. 박정희 대통령 사망
  부마민주항쟁은 공수부대의 무력에 의해 진압됐지만, 그 충격은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유신독재 체제의 종말로 이어졌다. 부마민주항쟁이 끝난 지 1주일 후인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 등은 청와대 인근의 비밀스러운 장소에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

  그날 저녁 만찬장에서는 부마민주항쟁 수습방안을 둘러싸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공수부대 투입을 성공적이라고 주장하는 차지철과 달리 김재규는 강압적인 탄압으로는 더 이상 유신체제를 존속시키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차지철은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은 200만 명을 희생시키고도 정권을 유지했는데 우리도 100만 명쯤 못 죽이겠느냐’고 섬뜩한 말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만약 부산‧마산의 사건이 다른 대도시로 번지고 서울에서도 진압되지 않으면 대통령이 직접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의중까지 내비쳤다. 김재규는 더 이상 이런 강압적인 유신체제를 존속시켜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유신체제와 긴급조치로 상징되는 ‘겨울공화국’은 일거에 무너졌다. 그러나 유신체제는 국민의 직접적이고 전면적인 저항에 의해 몰락한 것이 아니었다. 선거를 통해 정권이 교체되거나 대중의 힘에 의해 권력이 붕괴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 권력이 제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신체제 그 자체를 떠받쳐온 세력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밀정보조직, 정치군인집단, 경찰과 검찰을 핵심으로 한 관료집단, 독점재벌, 그리고 유신체제를 후원해온 미국 등이 바로 그들이었다.

2. 신군부의 하극상, 12·12쿠데타

  대통령의 유고가 확인되자 10월 27일 새벽 2시에 비상국무회의가 소집됐다. 헌법에 의해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게 되었고, 정부는 새벽 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곧바로 계엄공고 제5호를 통해 대통령 저격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여 그 책임자로 전두환 국군보안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였다. 합동수사본부는 보안사령부를 포함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등 정부의 모든 정보기관을 총괄 지휘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한편 10‧26사건 직후 군 내부에서는 권력기관을 맴돌며 출세만 노리던 ‘정치군인’을 선별해서 숙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정치군인’은 박정희 대통령 비호 아래 군부 내에서 최대의 사조직으로 성장한 ‘하나회’를 의미했다. 박 대통령은 군부를 장악하기 위해서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충직한 사조직 육성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육사 11기 동기였던 전두환, 노태우 등 박정희의 후원을 받으며 육사 졸업생 가운데 ‘영남인맥’의 우수한 장교들만 뽑아 비밀리에 운영했던 하나회는 군 내부의 주요 보직을 독차지하면서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최대 후견인이었던 박정희 대통령이 갑자기 사라지자 그동안 잘 나가던 하나회에 큰 위기가 닥친 것이다.

  위기를 느낀 전두환 소장은 정승화 참모총장이 10‧26사건 당시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에 연루된 의혹이 있다며 이를 조사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를 강제 연행하기로 계획했다. D-day를 1979년 12월 12일로 잡은 뒤 하나회 출신 소장파 장교그룹을 설득, 합류시키기로 하고 실행에 들어갔다. 군사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이미 정 총장을 연행해 놓은 상태에서 최규하대통령에게 정 총장 연행을 재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방부장관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며 재가를 거부했다.

  경복궁의 쿠데타 지휘부는 대통령이 재가를 거부하고, 육군본부에서 부대를 이탈한 지휘관들에게 부대복귀 명령을 내렸음에도 해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최규하 대통령에 대해 사실상의 연금조치를 취했다. 정승화 총장을 연행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그때까지 최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못함으로써 전두환 등 경복궁 30경비 단장실에 모인 지휘관들의 정승화 총장 연행은 명백하게 ‘불법행위’ 즉, 하극상의 군사반란이었던 것이다.

  1997년 대법원은 ‘12‧12, 5‧18상고심’에서 정승화 총장에 대한 강제 수사가 필요하지 않았으며, 그의 체포 목적이 범죄를 수사하는 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군의 지휘권을 실질적으로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위법한 체포행위’라고 판단했다. 또한 정승화 총장을 체포할 때 사전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않았고, 영장을 발부받을 수 없는 긴급한 사정이 있지도 않았기 때문에 법률에 규정된 체포절차를 밟지 않은 것은 위법이라고 판시했다. 그리고 재가를 받기 위해 집단으로 대통령을 강압한 사실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에 반항하는 행위로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반란군 지휘부는 무력을 통한 사태 장악만이 유일한 길이라 판단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박희도 1공수여단장에게 “국방부와 육군본부의 무력진압”을 지시하였고, 13일 새벽 1시경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또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13일 새벽 2시경 최세창 3공수여단장과 특전사 보안부대장 김정룡 대령에게 정병주 특전사령관 체포를 지시하였다. 새벽 3시경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사령관실로 총격을 가하며 난입한 자신의 부하 총에 총상을 입고 체포당했다.

  71방위사단장 백운택 준장은 제2기갑여단장 이상규 준장에게 전화를 걸어 수도기갑사단 전차에 대항할 수 있는 전차부대의 동원을 요청하였고, 노태우 사단장은 전방의 9사단 29연대를 즉시 중앙청으로 출동시키도록 지시하였다. 9사단 29연대와 제2기갑여단 16전차대대는 도중에 합류, 탱크를 앞세우고 서울에 진주하였다. 박희도 소장의 30사단 90연대는 반란군 지휘부를 보호하기 위해 중앙청을 점령하였다.

  마침내 합참의장 김종환 대장 등 8명의 장성들도 무장해제 당했다. 전두환 사령관은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보안사로 연행한 후 그를 데리고 새벽 5시경 청와대로 갔다. 최 대통령을 만난 노 장관은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정 총장 연행조사의 재가를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최 대통령은 더 이상 별다른 말없이 문서에 서명하였다. 사실상 강제로 쿠데타를 추인하는 서명이라는 사실을 최 대통령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서의 맨 아래에다 ‘05:10 AM’이라고 적었다. 대통령으로서 버틸 수 있는 한 버티다가 최종 순간 서명했다는 점을 분명한 역사 기록으로 남겨놓겠다는 의미였다. 어찌됐던 신군부의 거사는 대통령의 재가를 통해 합법적인 모양새를 갖춤으로써 일단 성공한 셈이었다.

  그러나 1997년에 대법원은 대통령의 재가를 ‘육군의 정식 지휘계통’에 있던 장성들이 반란군에게 제압당한 후 이뤄진 것으로 ‘사후 승낙’에 불과하며, ‘반란행위에 해당하는 정승화 총장의 체포행위나 병력동원행위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고 판결했다. 또한 일부 군인들이 육군의 정식지휘계통에 대항하여 병력을 동원한 행위는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대통령의 군통수권 및 참모총장의 군 지휘권에 반항한 행위로서 반란에 해당한다’고 규정했다.

  이날 밤 쿠데타에 소요된 시간은 12월 12일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10시간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5천여 명 규모의 병력과 전차 35대가 불법 동원됐다. 전선지역에 배치된 정규 전투부대가 서울로 진입했으며, 육군본부 지휘체제가 완전 마비됐다. 또한 한미군사협정을 위반하여 한미연합사령관의 사전 동의 없이 전방에 있던 9사단 병력을 수도권으로 이동하였다. 전두환 사령관은 다음날 국방부 금고를 뒤져 찾아낸 공금을 가지고 마치 전리품처럼 쿠데타에 동원된 부대들을 돌며 격려금조로 5천만 원씩을 나눠주었다.

  12‧12쿠데타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사령관은 군부에서 사실상 최고 실권자가 됐다. 그는 다음날 아침 곧바로 군 주요보직에 대한 인사를 단행했다. 주영복 국방부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 황영시 육군참모차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등 군 공식 지휘계통을 하나회 멤버이거나 우호적인 인물들로 완전히 바꿔서 이른바 ‘신군부’ 주도세력을 형성했다.

3. 신군부 반란세력의 정권탈취

  반란세력은 마침내 1980년 8월 최규하 대통령이 사임하고 전두환 대통령이 탄생하기까지 8개월의 시간이 소요된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 걸린 쿠데타’의 도정에 나섰다. 우선 신군부는 최규하 내각 장악을 위한 세 가지 조치를 취했다. 첫 번째가 비상계엄령의 유지였고, 둘째 합동수사본부의 권한 강화와 활동영역의 확대였으며, 셋째는 헌법개정작업의 지연이었다. 또한 신군부는 계엄령을 지속시키는 가운데 자신들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언론통제계획인 ‘K-공작계획’을 수립하였다.

  전두환은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으로는 효율적이고 직접적인 영향력 행사가 어렵다고 판단하고 공석 중인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노렸다. 중앙정보부장이 되면 첫째, 국무위원급으로 정부의 주요 정책결정에 참여할 수 있고, 둘째, 중앙정보부가 보유한 풍부한 비밀자금을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3월 말경, 전두환은 신현확 총리를 협박해서 중앙정보부장 추천을 받았고, 4월 14일에 최규하 대통령은 신현확 총리의 추천으로 전두환을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했다. 굳이 ‘서리’라는 명칭을 붙인 것은 당시 중앙정보부법 제7조에 ‘중앙정보부장의 타직 겸직 금지’ 조항 때문이었다. 보안사령관이면서 동시에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할 수 없게 돼 있는데 이를 피해가기 위한 꼼수였던 것이다. 중앙정보부장 겸직 이후부터는 실무자가 아닌 ‘주요각료’의 일원으로 내각이 결정하는 정책방향을 통제하기 시작했고 직접적인 영향력을 적극적으로 행사했다. 또한 국회의 감사를 받지 않고서도 중앙정보부의 일부 예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이 신현확 내각을 무력화시키고 유신관료 집단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였다면, 이른바 K-공작으로 알려진 보안사령부의 언론장악 계획은 국민여론을 신군부의 입맛대로 조작하기 위한 조치였다. 보안사 언론대책반이 1980년 3월경 작성한‘ 이 ‘K-공작계획’의 ‘K’는 ‘King(왕)’의 첫 글자를 따서 붙인 명칭인데, 신군부의 집권을 정당화하도록 여론을 조작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신군부는 ‘언론공작반’을 통해 언론사 사장 및 간부들을 차례로 접촉, 회유공작을 실시했다.

  1980년 2월 18일, 신군부는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공수부대와 후방의 주요부대에 ‘충정훈련’을 실시하라고 지시했다. 충정훈련은 군이 시위진압을 위해 실시하는 공세적인 진압 훈련이었다. 신군부는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생시위와 시민들의 저항을 경찰력만으로는 진압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고 아예 군대를 동원하여 진압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충정훈련’은 1979년 부마민주항쟁을 거치면서 특전부대를 중심으로 대도시 부근 일반부대가 참여하였는데 이들을 ‘충정부대’라 했다.

  1980년 4월에 들어서면서 폭동진압 훈련을 집중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전의 방어적, 수세적 훈련과는 달리 시위대를 향하여 돌격하여 와해시킨 뒤 재집결을 허용하지 않고 주모자를 체포하는 공세적 훈련으로 전향해서 실시하였다. 또한 길이 45~70cm, 직경 5~6cm의 물푸레나무 혹은 박달나무로 기존의 것에 비해 훨씬 크고 단단한 재질을 사용하여 특수 제작한 진압봉을 대량으로 만들어 부대원들에게 지급하였다. 또한 신속한 시위 진압을 위해 기동에 유리한 경무장과 진압봉을 반드시 휴대하게 하였다. 신군부는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을 ‘맹목적 저항세력’으로 규정짓고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 즉 투옥시키고 그래도 안 될 때는 ‘강경한 응징조치’를 취하기로 한 것이다.

  5월에 들어오면서 대학가의 시위 쟁점이 ‘비상계엄 해제’와 ‘전두환 퇴진’ 등 정치적 구호로 모아지고 학교 밖으로 진출하려는 조짐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대응하여 신군부는 병력을 은밀하게 이동 배치하는 등 5월 첫 주부터 사실상 군대를 앞세운 진압작전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신군부가 장악한 언론은 ‘K-공작계획’에 따라 이미 재갈이 물려져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이런 음모를 전혀 눈치 챌 수 없었다.

  5월 4일 권정달 정보처장 등 보안사 핵심참모 5명은 보안사령관실에서 12‧12사태 이후 군권을 장악한 신군부 핵심세력들에게 자신들이 마련한 ‘시국수습방안’을 보고한 후 토론을 거쳐 이 ‘집권 시나리오’를 확정했다. 이에 대해 1997년 대법원은 신군부가 이 ‘시국수습방안’에 따라 5월 17일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결의하고, 강압적으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 선포하였으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이런 일련의 행위가 바로 ‘내란’의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명분을 찾기 위해 ‘북한이 남침하려 한다’는 첩보를 조작하여 위기감을 조성했다. 5월 10일,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는 보안사령부로 찾아온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으로부터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한군의 남침첩보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첩보는 ‘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5월 15일에서 5월 20일 사이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내용이었다. 전두환은 참모들에게 즉각 여기에 대한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또한 그 내용은 전두환이 신현확 총리에게 전달했고, 5월 12일 임시국무회에서 중앙정보부 담당국장이 장관들에게 직접 보고했다.

  그러자 이런 소식을 접한 한미연합사 사령관 존 위컴(John Wickham) 장군은 ‘전두환 장군이 청와대 주인이 되기 위한 구실로 북한의 남침 위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 정보기관에서는 신군부가 퍼뜨린 남침설 첩보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일본의 내각조사실 한국담당 과장도 2010년 한국 기자에게 당시 '북한의 남침 첩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고 전면 부인했다.

  1980년 5월 11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도 곧바로 첩보내용을 자체 분석했는데 ‘북괴남침설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휴전선에서 관측된 북한 측 지상군은 정상 수준이고, 병력 및 장비를 증가하는 징후도 없으며, 모든 전선에서 대전차 장애물, 교량공사 및 영농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 항공정찰(SLAR)이나 특수첩보 상으로도 모두 정상이었다. 북한 해군 역시 평소와 다름없이 정상적인 훈련만 진행했다.

  육본 정보참모부는 5월 이전에 입수된 북한관련 첩보에도 이와 유사한 동향보고가 많았지만 모두 다 사실이 아니었다고 결론 내렸다. 만약 북한이 실제로 남침을 감행한다면 전쟁을 위한 준비가 구체적으로 포착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지상군을 주요 접근로 상에 배치하고, 전차 및 기계화사단 등 전략부대의 전선 이동, 군수지원 활동과 통신량 증가 등 전쟁 징후가 관찰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징후들이 포착되지 않았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육본 정보참모부는 ‘북괴 군사동향은 정상적인 활동 수준으로 특이 전쟁징후는 없음’이라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군부는 ‘북한의 남침첩보’를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삼았다.

4. 좌절된 민주화

  1980년 3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 여느 해와 달리 전국 각 대학의 캠퍼스는 활력이 넘쳤다. 10‧26 사건 이후 민주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로 다가왔다. 막연한 기대감과 원인 모를 불안감이 뒤범벅돼 있었던 이 시기는 ‘민주화의 봄’이라 불려졌다. 대다수 국민들도 18년간의 오랜 독재정치가 끝났기 때문에 민주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유신잔재세력을 제거하고, 정권 장악을 노리는 정치군인 집단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지 못하면 ‘민주화’는 한순간의 꿈에 불과했다.

  이 ‘민주화의 봄’ 시절 대학가의 최대 현안은 학생의 자치 조직인 총학생회 부활이었다. 전국의 주요 대학 학생들은 유신체제에서 정부가 강제로 만들었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대학이 자율화되어야 정치체제와 사회가 민주화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전국의 대학생들은 학생회 부활 등 학원민주화 투쟁 단계를 거쳐서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 등 정치 민주화운동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가자 대학은 민주화 운동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지로 변해갔다.

  1980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 출범을 시작으로 4월 초순에는 전국의 주요 대학들이 총학생회를 결성하기 시작하였다. 대학별로 독재 정권에 아부했던 어용교수와 족벌사학 퇴진 운동을 벌였고, 특히 병영집체훈련 거부가 주요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대학 신입생들은 의무적으로 군부대에 10일 간 입대하여 각종 군사훈련을 이수해야 했는데, 총학생회가 이 훈련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운동이 본격화되고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이 공방은 조만간 다가올 신군부와 학생의 일대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5월 1일에 서울대가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 퇴진’, ‘정부개헌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을 요구하기 시작하면서 대학가는 이제까지의 학내 문제 중심의 운동에서 정치개혁을 위한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간 정부와 대학 간에 팽팽하게 유지되던 긴장 관계는 폭발 직전으로 내닫게 된 것이다.

  5월 13일까지의 기간은 대학가의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대정부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5월 10일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확 등 유신잔당 퇴진’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5월 13일로 접어들면서 대학가의 시위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시위대가 교문 밖으로 진출한 것이다. 서울 도심 광화문 일대에서 6개 대학 2천5백여 명의 학생들이 ‘계엄 철폐’를 부르짖으며 야간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날 밤 고려대 등 7개 대학 일부 학생들이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후 도심 곳곳에서 학생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14일 새벽 4시 30분경, 고려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서울지역 27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 40여명이 모여 14일 오전부터 전면적인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각 대학의 총학생회 차원에서 공식적인 연대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다.

  학생 대표들이 헤어진 뒤 7시간이 지난 14일 정오를 전후하여 서울시내 대학생 7만여 명이 일시에 교문을 박차고 나왔다. “비상계엄 해제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유신잔당 타도하자” “언론자유 보장하라” “정부개헌 중단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 등을 외치며 학생시위대는 영등포, 청량리 등을 거쳐 광화문으로 수만 명이 진출하였다. 이 가두시위에 시민들은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유신말기의 탄압 속에서 시민사회는 자신들의 정치적 주장을 표현할 수 있는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일단 타오르기 시작한 가두시위의 불길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15일 오후, 서울역에는 10만 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집결했다. 대구, 광주, 부산, 인천, 목포, 청주, 춘천, 천안 등 대학이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마찬가지의 상황이었다. 이날 서울 이외 지방에는 24개 대학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여 경찰과 충돌하였다.

  서울역 광장에 모인 학생들은 광장을 중심으로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에 대한 대규모 성토대회를 벌였다. 학생들의 대규모 가두시위에 정치권은 황망하고 분주한 모습을 보였다. 신민당은 「비상계엄 해제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도 정부에 대해 “어떤 경우에도 물리적 방법에 의한 사태 해결은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시위 열기가 폭발할 듯 고조되고 있는데 갑자기 각 대학 총학생회 대표들은 이른바 ‘서울역 회군’을 결정한다. 철수해서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총학생회 대표들은 시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없는 상황에서 심야에 군과 충돌하는 것은 현명치 않다고 판단했다. 입수한 병력 이동 정보에 따르면 곧바로 군대가 투입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이 결정에 따라 서울역에 있던 학생들은 학교로 복귀했다. 다음날 아침, 서울의 대학가는 거짓말처럼 평온해졌다.

  전남대 등 광주지역 대학생들만 16일까지 도청 앞 광장에서 대중 집회를 연 후 야간에 평화적인 횃불행진을 이어갔지만, 토요일인 17일에는 그나마도 자취를 감추었다. 주말을 맞아 각 대학의 교정은 매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5. 1980년 봄 광주의 상황과 ‘5·17’ 비상계엄령 확대

  광주·전남지역도 타지역과 마찬가지로 정치개혁과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운동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학생운동은 전남대학교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었으며, 조선대학교 등 사립학교에서는 사학재단 비리 척결운동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1980년 초에 총학생회 부활을 위한 준비조직으로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고, 4월에 총학생회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남대 법학과 3학년 박관현이 압도적인 지지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어용교수 퇴진과 병영집체훈련 거부 등 학생들이 가장 시급하게 여기고 있는 학교 내 현안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다가 5월 초를 분기점으로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 일정 제시 등 정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신군부의 정권 찬탈 음모 소식이 전달되면서 위기감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전남대학교 총학생회는 5월 6일에 비상학생총회를 개최하여 5월 8일부터 14일까지 일주일을 ‘민족민주화성회’ 기간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5월 8일 전남대학교 교정에서 열린 제1차 ‘민족민주화성회’에서는 전남대 총학생회와 조선대 민주투쟁위원회 공동 명의로 제1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다. 이 선언문은 5월 14일까지 ‘비상계엄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만약 대학에 휴교령을 내린다면 온몸으로 거부할 것이며, 양심 있는 교수들의 적극적 동참을 호소하였다.
5월 14일‘ 민족민주화성회’ 마지막 날, 서울지역 대학생들이 광화문과 서울역 광장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전남대와 조선대도 당장 가두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날 오후 2시 총학생회의 지휘 아래 전투경찰대의 저지를 뚫고 교문을 돌파한 전남대생 7천여 명은 오후 3시에 도청 앞 광장에서 집회를 강행하였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광주시민들은 신군부세력이 어떻게 나올지 예측할 수 없고, 정세가 너무 불투명하여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학생들의 시위에 선뜻 동참하지 않았다.

  광주지역 대학생들의 가두시위는 다음날인 15일에도 계속되었다. 오전에 전남대에서 ‘제3차 민족민주화대성회’를 마친 1만여 명의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광주교대생 1만여 명, 전남대교수, 청년, 시민 등 수 만 명의 인파가 도청 광장에 집결했다. 특히 전국의 모든 지역이 시위를 중단한 가운데 개최된 5월 16일의 시위에는 광주 일원의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과 일반시민 등 5만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으며 밤이 되자 평화로운 횃불시위로 그간 세 차례에 걸친 민족민주화성회를 마무리하였다. 당시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 찾아와 평화시위를 보장해달라고 요구하자 흔쾌히 받아들여 경찰과 학생 사이에 아무런 충돌도 발생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이제 자신들의 의사는 충분하게 전달했으니 정부 측의 답변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17과 18일은 쉬기로 했다. 만약 정부가 계엄해제와 향후 정치일정 등을 명확히 밝히지 않을 경우 19일부터 다시 성토대회를 벌이기로 하고 휴식에 들어갔다. 한편 16일 도청 앞 집회에서 대학생들은 만약 휴교령이나 휴업령이 내린다면 일차적으로는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교문 앞에서, 그리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12시 정오에 도청 광장에 집결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학생과 시민들의 강렬한 민주화 요구에 힘입어 신민당은 5월 14일 ‘비상계엄해제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여당인 공화당도 적극적인 자세로 바뀌었다. 이로써 5월 20일 경으로 예정된 임시국회에서 계엄해제 결의안을 양당이 공동 처리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더욱이 여기에 유신체제를 지탱해왔던 ‘유신정우회’까지도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자 신군부의 위기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신군부는 한껏 달아오른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이 사회혼란을 조장하여 북괴의 남침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사회질서를 회복한다는 명분 아래 무력을 앞세운 권력 장악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5월 17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국방부 제1회의실에서 주영복 국방부장관 주재로 전군 주요지휘관회의가 열렸다. 43명의 장성이 참석한 이 회의에서는 ①비상계엄 전국 확대 ②국회해산 ③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설치 등이 논의되었다. 국방부장관은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전군 주요지휘관들의 합의된 의견이라고 서둘러 결론짓고, 백지를 돌려 참석자들로부터 ‘연서명’을 받았다.

  5월 17일 밤 9시42분 중앙청에서 제42회 임시 국무회의가 열려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였다. 회의장 주변에는 계엄군들이 무장을 하고 경계를 섰는데, 사실은 국무위원들을 겁박하여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신군부 계획의 일환이었다. 중앙청 내부 현관과 계단, 복도에는 1~2m 간격으로 군인들이 도열하였다.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헌병단 통신과는 중앙청 내 전화선 2,440개를 모두 절단했다. 노태우 수경사령관은 상급기관인 육군본부에 병력동원에 대해 전혀 보고하지 않고 공식적인 지휘체계를 무시한 채 병력을 이동, 배치했던 것이다. 이런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국무회의가 열렸고, 찬성이나 반대 토론 없이 불과 8분 만에 제주도를 포함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가 의결됐다. 최규하 대통령은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선포하였다.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는 대다수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절실한 요구를 정면으로 부정한 조치였다. 1997년 대법원은 이날 병기를 휴대한 병력이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폭력적인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하도록 강제한 것은 ‘국헌문란’이라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은 ‘국민주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국민의 기본권 보장’ ‘법치주의’ 등을 국가 근본이념 및 기본원리로 헌법에 정하고 있다. 그런데 헌법에 정한 민주적 절차에 따르지 않고 국가기관인 ‘국무회의’의 권능 행사를 폭력으로 불가능하게 만든 상태에서 정권을 장악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용인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전두환 등 정치군인들이 주도한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가 내란죄의 구성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의 협박 행위가 되므로 이는 내란죄의 폭동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5월 18일 새벽 1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계엄포고 원안은 보안사에서 입안하여 계엄사령부로 보내졌다. 주요 내용은 ①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②대학 휴교 ③옥내외 집회·시위 및 전·현직 국가원수 비방금지 ④직장이탈 및 파업 불허 ⑤언론 사전검열 등이었다. 계엄군은 계엄포고령 발령 이전인 18일 새벽 0시20분부터 이미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의사당을 점거해 버렸다.

  포고령을 앞세워 군인들이 국회를 무력으로 점거하여 사실상 ‘국회 해산’과 다름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신군부는 대통령이 ‘국회 해산’을 거부하자 ‘계엄포고령’이라는 변칙적인 방법을 통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지 않고 정치활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사실상 국회의 기능마저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한편 경찰은 5월 17일 오후 전국학생회장단 모임이 열리고 있던 이화여대를 급습하여 10여명의 학생대표를 연행하였고, 밤 10시부터 전국적으로 예비검속을 실시하여 2,700명 정도의 학생과 반정부 인사들을 강제로 연행하였다. 밤 11시경 국기문란자로 김대중 국민연합 공동의장을, 부정축재자로는 김종필 공화당 총재를 연행하는 등 다음날 새벽까지 밤중 내내 전국적으로 검거선풍이 몰아쳤다. 이때 총 2,699명이 검거됐고, 그 중 2,295명이 훈방됐으며, 404명이 공소제기 되었다. 이와 같은 검거작전은 향후 정국 운영에 방해가 될 수 있는 유력인사들을 정치권에서 미리 제거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경쟁자 없이 권좌에 오르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날 밤 광주지역의 사회운동·학생운동의 지도자도 상당수가 검거되었다. 광주의 검거대상자는 전남대 12명, 조선대 10명 등 총 22명이었다. 전남에서 계엄합동수사단은 광주505보안대가 중심이고, 중앙정보부, 경찰 등이 보조역할을 했다. 전남 계엄합동수사단은 22대 차량과 86명의 인원이 출동해 정동년 등 복적생들과 대학의 총학생회 간부들을 집중 검거했다.

  한편 육군본부는 14일 오전 7시55분에 국가 중요 보안목표와 주요대학에 군 병력 배치 명령을 하달했다. 이 명령에 따라 전남북계엄분소장인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광주 시내 주요 시설물에 이날 오후부터 계엄병력을 배치했다. 31사단 96연대 병력이 광주시내 KBS건물에 42명, MBC 21명, CBS 11명, VOC(전일방송) 11명 등 주요 방송사 건물에 배치돼 경비에 들어간 것이다.

  이날 오후 윤흥정 전교사령관은 정웅 31사단장, 신우식 7공수여단장이 머리를 맞대고 7공수여단의 광주배치에 따른 수송수단 지원도 미리 협의했다. 그리고 5월 8일부터 16일 사이에 공수부대 수뇌부들도 헬기를 타고 서울에서 내려와 광주 상무대의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광주에서 시위가 격화되면 즉각적으로 최정예 군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할 준비를 철저하게 갖추고 있었다. 5월 18일에 시작된 광주의 비극은 그 이전에 이미 시한폭탄처럼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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