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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화운동과 유혈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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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5‧18민주화운동과 유혈 진압

1. 5월 18일 민주화운동의 발발

  • 비극의 시작
  1980년 5월 17일 21시 40분,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선포안이 찬반토론 없이 단 8분 만에 의결되었다. 그와 동시에 전두환 신군부는 전국 92개 대학에 신속히 계엄군을 투입했다. 국회, 교도소, 언론사 등 보안목표 109곳에는 계엄군과 별도로 전차 4대, 장갑차 60대를 배치했다. 18일 새벽 0시 20분 계엄군은 경장갑차 8대, 전차 4대를 앞세워 국회 정문을 봉쇄했다.

  비상계엄을 해제하기 위한 임시국회를 미리 막기 위해서였다. 새벽 1시 계엄사령관은 ‘계엄포고령 제10호’를 발령했다. 정치활동 중지, 집회 및 시위 금지, 대학 휴교, 언론 검열, 파업 및 유언비어 유포 금지 등 모든 활동을 중지시키는 내용이었다. 포고령에 담긴 주요 내용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지시로 보안사령부가 계엄사령부에 보내 작성한 것이었다. 보안사 대공처장 이학봉은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즉각 소요배후 조종자 및 권력형 부정축재자를 일제히 검거하도록 전국 각 지역 보안부대에 지시했다. 김대중,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들과 전남대 복학생 등이 연행되어 합동수사단에 끌려갔다.

  비상계엄 확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신군부의 감춰진 실제 목표는 광주였다. 계엄사는 서울에 1‧3‧5‧9‧11‧13공수여단을, 광주에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여단 33대대와 35대대를 즉각 배치했다.

  공수부대는 ‘충정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오직 ‘시위진압훈련’에만 몰두해 온 특수부대였다. 원래 공수부대는 전쟁이 나면 적진에 깊숙이 침투해 중요한 인물을 암살하거나 적의 군사시설을 폭파하는 등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게 주된 임무다. 보통 때는 침투작전에 대비하여 낙하훈련과 천리행군 등을 통해 최강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군사정권은 공수부대를 전방이나 적진에 침투시킨 것이 아니라 ‘충정부대’라고 이름 붙여 정권 보위 목적으로 사용했다. 1979년 10월 부마항쟁에 3공수부대를 투입하여 시위를 진압했고, 그 이후 시위진압 목적의 특수훈련을 더욱 강화했던 것이다.

  7공수여단 33, 35대대는 5월 17일 밤 10시 30분 목표지점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고 주둔지인 전라북도 금마를 떠나 약 2시간 후 자정 무렵 전남대와 조선대 운동장에 도착했다. 육군본부 ‘정기작전보고 80-5’ 문서에 따르면 7공수는 이미 사흘 전인 5월 14일부터 비밀리에 이동에 따른 절차를 준비했다. 국무회의 의결 이전인 17일 오전 10시 40분 제2군사령관은 31사단장에게 광주지역 8개 전문대에 31사단 병력 투입을 지시했고, 오후 5시에는 7공수를 위해 전남대와 조선대에 천막을 미리 설치했다. 7공수 투입 준비를 비상계엄 확대 이전에 비밀리에 마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계엄군의 움직임을 광주 치안을 담당했던 전라남도 안병하 경찰국장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계엄당국은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채 공수부대를 은밀하게 이동시켰던 것이다.
  • 7공수여단과의 첫 충돌
  5월 17일 밤 전남대 총학생회는 혼란에 빠졌다. 이날 밤 계엄확대와 동시에 밤중 내내 전국에 검거 선풍이 몰아쳤다. 7공수는 광주 도착과 동시에 곧바로 교내 수색에 들어갔다. 전남대와 조선대 도서관이나 학생회관에서 밤을 새우던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갑자기 들이닥친 공수부대에게 두들겨 맞은 뒤 모조리 연행되었다. 전남대에서는 69명, 조선대에서는 43명의 학생들이 영문도 모른 채 붙잡혀갔다. 같은 시각 전북대에서는 7공수가 수색하는 과정에서 농학과 2학년 이세종 학생이 학생회관 옥상에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전날 밤 9시 TV 뉴스에서는 임시국회가 소집되어 ‘계엄령 해제’ 등 민주화가 곧 눈앞에 펼쳐질 것처럼 보도했는데 공수부대가 급습한 것이다. 전남대 총학생회는 전날 오후 늦은 시각 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들이 계엄당국에 연행돼 갔다는 소식을 미리 접했다. 박관현 총학생회장 등 지도부는 18일 새벽까지 모두 광주를 빠져나가 여수 등지에 몸을 숨겼다.

  광주지역은 총학생회 지도부의 부재 속에서 일반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민주화운동의 불길이 타오르게 됐다. 항쟁의 첫 도화선이 된 18일 아침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든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이었다. 5월 중순 아침 날씨는 약간 쌀쌀했으나 화창했다. ‘휴교령이 내리면 다음 날 오전 10시 전남대 교문 앞에 모이자’고 마지막 민족민주대성회에서 약속했던 바에 따라 아침 식사를 마친 학생들 몇몇이 전남대 정문으로 모여들었다. 갑작스런 계엄군의 등장으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마비된 것은 다른 지역도 광주와 비슷했다. 만약 휴교령이 내릴 경우 학생들의 행동 지침도 전국적으로 공통적이었다. 그러나 18일 오전 계엄확대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민주화 시위를 시작한 곳은 오직 광주뿐이었다.

  무장한 7공수여단 33대대 병력 일부가 교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오전 10시쯤 점차 불어난 학생 숫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 공수부대를 향해 항의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숫자가 200~300명으로 더 불어났다. 교문을 지키던 공수부대원이 갑자기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괴성을 지르며 위협적으로 달려 나왔다. 진압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순식간에 10여 명의 학생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위기를 피한 학생들은 부리나케 도망쳤다.

  군인들의 예상치 못한 날선 공격에 놀란 학생들은 교문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광주역에서 다시 모였다. 어느 덧 학생 숫자는 300~400여 명으로 불었다. 격분한 학생들은 광주의 중심지인 금남로까지 약 3km를 단숨에 달려갔다. 숨을 몰아쉬면서도 격한 목소리로 주위의 시민들을 향해 ‘비상계엄 해제하라’, ‘김대중을 석방하라’, ‘휴교령을 철회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계엄군은 물러가라’고 두서없이 외쳐댔다.

  11시 30분경 시내 중심가인 금남로 가톨릭센터 앞에는 500여 명으로 불어난 학생 시위대열에 수녀 50여 명도 합세했다. 금남로 한쪽 차선을 점거한 채 항의농성이 시작됐다. 경찰기동대가 들이닥쳐 최루탄을 뿌려 이들을 해산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광주시내에는 아직 공수부대가 투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의 진압 강도는 횃불집회 때와 달리 사나웠다. 다만 안병하 전남도경 국장은 이날 오전 11시경 경찰들에게 진압방침을 하달했다.

“분산하는 자는 너무 추격하지 말 것, 부상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 저항하는 자는 연행할 것, 연행과정에서 학생들의 피해가 없도록 할 것”
  • “조기에 강경 진압하라”
  광주에서 오전 시위상황을 보고 받은 육군본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투입하여 강경 진압하라고 지시했다. 7공수여단은 광주 사정을 잘 모르기 때문에 31사단의 작전통제를 받도록 돼 있었다. 정웅 31사단장은 전남 도경을 통해 경찰의 시위상황을 점검한 결과 아직 공수부대를 투입할 정도의 시위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경찰만으로도 진압할 수 있는 정도’라고의 판단했다. 그러나 계엄사의 거듭된 공수부대 투입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오후 2시 25분경 31사단장은 헬기로 조선대에 들러 2명의 7공수 대대장, 광주경찰서 경비과장과 함께 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광주시내 지도를 펼쳐 놓고 시위상황을 점검하면서 오후 4시까지 7공수가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오후 4시경 7공수 33대대는 수창초등학교 부근 금남로 끝 지점에서 학생시위대를 향해 ‘돌격 앞으로’라는 명령과 함께 강제진압을 시작했다. 시위 가담 여부와 상관없이 도로 주변에 있는 젊은 사람이면 남녀를 불문하고 쫓아가 진압봉으로 강하게 타격했다. 반항하는 기색을 보이면 공수대원 2~4명이 떼거리로 몰려들어 진압봉으로 때렸다.

   공수부대원들은 도주하는 학생과 청년들을 뒤쫓아 시내 곳곳을 누비면서 일반 가정집 안방에까지 군화를 신은 채 들어갔다. 젊은 남자들을 보이는 대로 끌어내어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다.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짐짝처럼 군 트럭 적재함에 던져 넣었다. 대검을 진압무기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몸서리를 쳤다. 도청 부근 금남로 1가에서 공수부대는 경찰을 구타하기도 했다. 그 경찰은 붙들려온 시민과 학생들을 몰래 풀어주다 공수부대에게 들켰던 것이다.

   광주의 최초 사망자는 18일 공수부대원들에게 무자비한 구타를 당한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4세)이었다. 김경철은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집단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진 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다. 공수부대원들은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굼뜬 그의 행동을 보고 일부러 그런다고 더욱 두들겨 팼다. 그 결과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 상식적인 수준의 시위 진압이 아니었다. 공수부대는 처음부터 시위대의 기를 꺾어놓겠다는 생각이었다.

   2군사령부의 ‘계엄상황 일지’에는 5월 18일 하루 동안 광주에서 연행된 숫자가 모두 405명이라고 적혀 있다. 대학생 114, 전문대생 35, 고교생 6, 재수생 66, 일반시민 184 등이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대검사용에 의한 부상)을 입었고, 12명은 중태라고 기록되어 있다.

2. 5월 19일

   5월 18일 오후 2시 30분경, 전두환, 정호용 등 신군부 수뇌부는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11공수부대를 광주에 급히 내려 보내기로 결정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1988년 국회 5‧18청문회에서 11공수의 광주 증파 이유를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광주에서 소요 진압을 못하고 고전을 치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보내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호용의 이 말은 거짓이다. 7공수가 광주 금남로에 투입된 시각은 18일 오후 4시였다. 11공수 증파는 그보다 1시간 30분이나 앞선 시각 결정된 것이다. 7공수가 시위진압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마치 진압하면서 고전을 치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증파한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이다. 공수부대 광주 증파는 현지 시위진압 상황과 상관없이 신군부 핵심부의 강경진압 방침에 따라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급습하듯 전격적으로 투입된 공수부대는 시민들의 분노를 크게 자극하였다. 11공수부대는 19일 오전 광주시내에서 아직 시위가 채 시작되기도 전에 금남로에 투입돼 장갑차를 타고 다니며 시민들을 겁주기 위한 위협시위를 전개했고, 여기에 분노한 시민들이 오히려 더 시위대열에 가세하였다.

   신군부 지휘부는 공수부대를 하루에 한 개 부대씩 연속 3일간 광주에 내려 보냈다. 18일에는 7공수 2개 대대 688명, 19일 11공수여단 956명, 20일 3공수여단 1,477 등 2,856명을 차례로 증파하고, 뒤이어 21일, 22일 이틀 사이에는 보병 20사단 병력 4,093명을 내려 보냈다. 공수부대와 20사단을 합치면 모두 6,949명의 추가 병력이 서울 등 외부로부터 광주에 투입된 것이다. 광주 주둔 31사단 병력과 전교사 소속 계엄군 13,430명으로는 모자라 외부에서 시위진압 목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최정예부대 6,949명을 투입하여 총 20,379명의 병력이 맨손으로 민주화운동에 나선 광주시민을 대상으로 가공할만한 진압작전과 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광주에 투입된 7·11·3공수부대의 여단장들은 여단본부가 설치된 조선대나 전남대가 아니라 주로 전교사 사령부가 위치한 상무대에서 머물렀다. 직속상관인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전교사에다 전용사무실과 공수부대 상황실, 통신실까지 마련한 채 그곳에서 작전을 지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광주에 배치된 공수여단은 31사단이나 전교사가 ‘작전통제’를 하도록 엄연히 육군본부가 지시를 내린 상황이었다.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비록 공수여단 직속상관이라 할지라도 이들 3개 공수여단을 직접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수부대 여단장들은 31사단장이나 전교사령관의 지휘를 받지 않았거나 아예 무시했다. 전교사에서 있던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지시만 따랐다. 11공수여단장 최웅은 헬기로 전교사와 조선대를 왕래하며 진압 작전을 지휘했다. 1996년 검찰은 11여단장 최웅에게 여단본부를 벗어난 지역에서 지휘한 것은 ‘위수지역 이탈’이 아니냐고 추궁하였다. 최웅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했다. 3여단장 최세창도 여단본부가 있던 전남대가 아닌 전교사에서 줄곧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함께 머물면서 무전으로 부대를 지휘했다. 최세창 역시 검찰에서 당시 자신의 행위가 ‘위수지역 이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잘못을 시인했다.

   이들 두 여단장의 진술은 당시 진압군의 ‘지휘체계가 일원화’되지 않고, ‘이원화’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1988년 국회 청문회에서 전교사 부사령관 김기석 소장은 ‘지휘체계 이원화’를 처음 언급하여 주목을 받았다. 그 뒤 31사단장, 전교사 작전참모 등이 당시 시위진압에 나선 공수부대가 정식 지휘계통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지휘권한이 없는 정호용 특전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강경진압을 펼쳤다고 주장했다.

   당시 계엄군의 정상적인 지휘체계는 ‘계엄사령관 – 2군사령관 – 전교사령관 – 31사단장 – 작전통제부대장(3개 공수여단장)’으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안사령관 – 계엄사령관 – 특전사령관 – 공수여단장’으로 진압작전이 하달되었다는 것이다. 즉, ‘2군사령관 – 전교사령관 – 31사단장’이 공식 지휘체계에서 배제되어 버렸다.

   이와 같이 지휘체계가 이원화가 가능했던 것은 보안사령관의 정보 독점과 조기 강경진압 방침 때문이다. 계엄이 아닌 평상시에 보안사령관은 국방부장관의 통제를 받아 육‧해‧공군 등 3군의 보안업무를 감시하고 대공정보를 수집 분석 수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평소에는 육군참모총장도 보안사령관의 감시를 받는 시스템이다.

   계엄령이 내리면 보안사령관의 위치가 달라진다. 국방부장관이 아닌 계엄사령관(육군참모총장이 수행)의 지휘를 받도록 계엄법에 규정돼 있다. 계엄이 선포되면 국방부장관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되고 계엄사령관이 3군을 통제하여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는 체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계엄 지휘체계를 어기고 평상시에 국방부장관에게만 보고하던 습성대로 움직였다. 12‧12군사쿠데타 이후 자신에게 집중된 강력한 힘을 이용하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된 육군참모총장을 무시하거나 오히려 감시의 대상으로 삼았다.
  • 공포의 금남로
  공포와 불안 속에서 밤을 새운 광주 시민들은 다음 날인 19일 아침, 공수부대의 만행에 대해 몸서리쳤다. 19일 광주 지역은 대학을 제외한 초·중·고등학교가 정상 수업을 했고, 관공서나 기업체, 공장 등도 대체로 정상적으로 근무했지만 일손을 거의 놓은 채 불안한 모습들이었다. 시내 중심가의 상가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으며, 이른 새벽부터 군인과 경찰이 시내 전 지역에 걸쳐 삼엄한 경비를 서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금남로에는 일체의 차량이 통행할 수 없도록 막았다. 시민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금남로로 나왔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경 금남로에 모여든 사람은 2,000~3,000명에 이르렀다. 18일과 달리 시위대열 속에는 대학생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일반 시민들이 훨씬 많았다. 10시 40분경, 충장로에서 경찰과 공수부대는 시민을 향해 최루탄을 쏘며 해산에 나섰다. 시민들은 그냥 쫓겨 가지 않고 야유를 보내고, 돌을 던지며 항의했다. 어제의 잔인한 진압에 분노하고 있었다. 군경과 시민의 충돌이 시작된 지 30분 정도 지나자 군용 트럭 30여 대에 분승한 공수부대가 도청 앞과 금남로 사거리에 진출해 시위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밤중에 광주에 투입된 11공수여단이 본격적으로 시위 진압에 나선 것이다.

  11공수의 진압작전은 어제 7공수와 마찬가지로 강력했다. 항의하던 할아버지와 아주머니, 도망가던 여학생, 버스 기사, 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원생들 모두가 진압 대상이었다. 3~4명이 한 조가 되어 시위 현장 주변의 건물이나 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붙잡힌 시민들은 팬티만 남긴 채 발가벗겨져 군 트럭에 실려 갔다. 이날 낮부터 광주 시내 종합병원과 개인병원에는 부상자들이 줄지어 입원하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트럭에 실려 가지 않고 중상을 당한 채 달아났거나 주위의 도움으로 계엄군의 손길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중경상을 입은 많은 부상자와 죽어 가는 사람들을 광주 시내의 병원 시설로는 모두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일 오후, 시민들의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시민들의 눈에 비친 공수부대는 더 이상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군인이 아니라 시민들의 생명을 빼앗는 존재로 바뀌었다. 시위 양상도 점점 과격해졌다. 오후 4시 50분, 계림동 광주고등학교 앞 도로에서 계엄군이 최초로 발포를 하였다. 고등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다. 그는 주위 시민들의 도움으로 즉각 전남대병원에 옮겨져 생명은 구할 수 있었지만, M16 총알이 복부 오른쪽을 관통해 좌측 엉덩이로 빠져나가는 중상을 입었다.

  광주 시내 시위상황이 이렇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정부는 광주에서의 사태와 관련해 아무 입장 표명도 하지 않았다. 또한 각종 보도 매체들도 계엄 당국의 철저한 통제 속에서 광주의 상황과 관련된 보도를 전혀 하지 않았다. 19일 밤, 시위는 통행금지도 소용없을 만큼 격렬하게 자정까지 이어졌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체포된 인원만 277명에 이를 정도였다. 부상자 가운데 5명은 날카로운 대검으로 추정되는 물체에 찔려 ‘자상’으로 확인되었다.

  전교사의 〈광주 소요 사태 분석-교훈집〉은 광주 시민이 공수부대에 맞서 죽음을 불사한 항쟁을 벌이게 된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해산보다는 체포 위주로 협공, 소요 진압 중 지역 주민이 보는 가운데 폭동 군중과 격렬한 충돌 발생, 도피 군중을 추적·체포하는 과정에서 기물 파괴, 가족 위협에 대하여 시민들의 야만적 감정 폭발’, ‘소요 진압 중 발생된 사상자 및 체포자의 처리 지연과 장기간 노상 방치로 주민들의 감정을 촉발’
  군 자료는 이렇게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7‧11공수의 초기 진압 작전은 ‘과잉진압’이라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참혹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AP통신 테리앤더슨 기자는 ‘사실상 군인들에 의한 폭동’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에 대해 1997년 대법원은 ‘계엄군이 난폭하게 광주 시민의 시위 행위를 진압한 행위가 내란죄의 구성 요건인 폭동의 내용으로서 폭행, 협박에 해당함이 명백하다’고 판시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수뇌부들이 ‘국헌문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그러한 목적이 없는 계엄군을 이용하여 위와 같이 난폭하게 시위를 진압’하였으므로, ‘간접 정범의 방법으로 내란죄를 실행한 것’으로 보았다.

  한편 이날, 미국의 태평양지구 공군사령관인 제임스 D. 휴즈 중장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기자회견을 하면서,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국의 전술 공군기들은 매우 빠른 시간 내에 한국 전선으로 출격할 것이며, 어떠한 북한의 공중 공격도 격퇴할 능력을 한미 공군은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3. 5월 20일

  • 대중 봉기
  밤새 내리던 비가 20일 오전 9시경 그쳤지만 오전 중 시위는 소강상태였다. 20일 새벽 두 번째 희생자 김안부(35세, 일용노동자)가 광주공원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전두부 열상’으로 앞머리가 찢어진 것이다. 점심시간이 지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어림잡아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금남로를 뒤덮었다. 유인물〈투사회보〉가 뿌려졌다. 〈투사회보〉는 윤상원이 중심이 되어 들불야학 팀이 만들었다. 관제 언론과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대항하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발행한 것이다.

  오후 3시 금남로, 공수부대의 진압과 시민들의 저항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제와 달리 시민들 가운데 도망치거나 방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 결사적이었다. 오후 7시, 200여대의 택시가 일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무등경기장을 출발해 금남로에 들이닥쳤다. 택시와 버스, 트럭 행렬은 시위 군중들에게 자신감을 불러 일으켰다. 차량 행렬이 금남로에 이르자,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했다. 공수대가 도청을 향해 다가오는 차량행렬을 향해 최루탄을 쏟아 부었다. 개머리판으로 차량의 헤드라이트를 부수며, 닥치는 대로 운전기사를 끌어내 두들겨 팼다. 잠시 물러난듯하던 시위대가 또 다른 시위대와 합류해 도청을 향해 거센 파도처럼 다시 압박해 들어왔다. 군경 저지선이 금남로 3가에서 1가 전일빌딩 앞까지 밀려갔다. 7시 30분경, 도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시위대와 계엄군 사이에 혈전이 벌어졌다. 20일 초저녁 차량 시위는 평범했던 시위가 거대한 규모의 ‘대중봉기’로 질적인 변화를 겪는 계기가 됐다.

  시위대는 저녁 식사시간이 되었는데도 흩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갈수록 공방전은 더욱 치열해져갔다. 밤 9시 20분경,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 시위대의 광주고속버스 차량에 경찰 4명이 깔려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밤 10시경, MBC 방송국이 불타기 시작했다. 새벽녘에는 광주역 근처 KBS 방송국도 불탔다. 혼란에 휩싸인 광주상황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벽 1시경, 광주세무서도 불길에 휩싸였다. ‘군대는 국민이 낸 세금으로 유지되는데, 군인들이 휴전선은 안 지키고, 국민을 죽이러 왔다’며 격분한 것이다.

  뜨거운 항쟁의 열기가 광주를 달궜다. 분노의 도가니였다. 자정 무렵 시위대는 공수부대가 집중 방어하던 도청, 광주역, 조선대 세 곳을 향해 몰려들었다. 거리와 주택가는 암흑으로 변했다. 시위대의 분노만 차량 불빛을 따라 출렁거리며 이리저리 몰려다녔다. 함성과 차량의 경적 소리가 도심을 뒤덮었다. 이날 밤 혜성처럼 나타난 전옥주, 차명숙 두 여성이 방송차량에서 마이크를 잡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수천 명의 시위대를 새벽까지 이끌었다. 10만여 명의 인파에 포위돼 버린 공수대원들은 공포심에 휩싸였다. 방송하는 두 명의 여성을 저격하려고 시도했으나 불가능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에워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밤 10시 30분부터 11시 사이에 3공수가 방어하던 광주역 일대에서 요란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시위대 차량이 광주역을 향해 군의 저지선 돌파를 반복적으로 시도하자 3공수부대에서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의 맨 앞줄에 있던 시민들이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이날 밤 광주역에서 최소 5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수십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앞선 시각 밤 10시경, 광주역 부근에서 공수대원 1명이 시위대의 화물트럭에 깔려 사망했다. 계엄군 희생자로서는 최초였다. 이 상황을 보고받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부대원들에게 실탄을 지급하고 유사시에는 발포를 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 무장하지 않은 시민을 향해서 공공연하게 ‘총격전’을 시작한 것이다.

  광주역 발포는 3공수여단장의 지시에 의한 최초의 ‘발포’였다. 실탄 분배와 발포는 계엄 상황일지라도 매우 엄격하게 통제된다. 계엄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승인에 의해서만 ‘발포명령’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3공수여단장은 실탄 분배와 집단 발포를 계엄사령관은 물론 작전통제 부대장인 31사단장, 전교사령관, 2군사령관 등 공식지휘체계 상에 있는 누구에게도 보고하지 않았다. 3공수의 발포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2군사령부는 밤 11시 20분 ‘발포 금지’, ‘실탄 통제’ 등의 지침을 전교사에 긴급히 내려 보냈다.

  자정 무렵 전교사령관은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공수부대에 대한 광주시민의 감정이 너무 악화돼 시위진압이 사실상 불가능하니 공수부대를 시 외곽으로 철수시키고, 보병부대를 투입하는 것이 좋겠다’고 보고했다. 계엄사령관은 전교사령관 보고내용을 국방부장관과 협의한 뒤 공수부대 외곽 철수를 승인했다. 계엄수뇌부도 공수부대로는 시위대의 저항을 더 이상 잠재울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21일 새벽 2시, 3공수여단은 광주역 사수를 포기하고 쫓기듯 전남대로 퇴각하였다.

  광주역 발포로 사태는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3공수에 이어 도청을 방어하던 11공수여단에도 이날 밤 실탄이 분배됐다. 11공수여단의 실탄 분배는 다음날 21일 오후 1시 도청 앞 집단 발포로 이어졌다. 또한 광주역 집단 발포는 시위대를 크게 자극했다. 시위대는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총을 쏘아 죽이는데 우리도 살기 위해서는 무장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이런 주장은 시위대들 사이에 공감을 얻어 급속히 확산되었다. 여기에 직접 불을 지른 것은 21일 오후 1시 대낮에 공수부대가 시민을 향해 집단으로 발포한 상황이었다.

4. 5월 21일

  광주역에서 3공수의 예상치 못한 패퇴는 신군부 지휘부를 큰 혼란에 빠뜨렸다. 계엄사령관은 21일 새벽 4시 30분, 긴급 참모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에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 ‘공수부대 외곽 철수’, ‘광주 봉쇄’ 등의 방침을 정했다. 진압작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계엄사 공식회의에서 발포와 관련해서 ‘자위권 발동’이 처음 거론되었다. 하지만 이미 5시간 전 광주역에서는 3공수여단장의 발포 지시가 있었다. 이 점 때문에 계엄사가 아닌 비공식 지휘체계를 통해서 발포명령이 지난 밤 하달되었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론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계엄사령관은 오전 9시 20분이 지나서야 지난밤 광주역에서 있었던 발포사실과 그 뒤 계엄사 새벽 회의에서 검토한 ‘자위권 발동’ 방침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오후 2시경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 수뇌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방부장관실에서 계엄사 회의에서 거론된 ‘자위권 발동’을 확정했다. 그런데 이 시각 역시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발포 사태가 벌어진 때보다 1시간이나 경과한 뒤였다. 이렇듯 ‘발포’와 ‘자위권 발동’을 둘러싸고 논리적으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은 군의 기록과 관련자들의 주장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혹과 추측을 낳고 있는 것이다.
  • 가자, 도청으로!
  21일은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광주에 공수부대가 투입된 지 4일째였다. 이날 아침 금남로에는 지난밤 광주역 발포 때 사망한 시신 2구가 등장했다. 대형 태극기에 덮인 채 손수레에 실려 있는 시신은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시위대의 식사는 동네 아주머니들이 준비했다. 시장 주변에서는 쌀과 반찬, 음료수, 빵 등을 모아 지나가는 시위대 차량에 올려줬다.

  21일 아침 20사단 대규모 보병 병력이 광주에 증파됐다. 시내 중심부에 고립된 채 포위 상황에 처한 공수부대를 대신해서 일반 군인을 투입하여 시민들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계획이었다. 한편으로는 광주에서 밖으로 연결되는 도로를 차단하여 광주를 외부세계와 단절시킬 계획이었다. 20사단 정규군의 투입은 시내 중심부에서 공수부대가 주도하던 시위진압을 포기하고 외곽봉쇄로 전환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외곽봉쇄는 굳이 서울에서 20사단 병력 4천여 명을 광주로 데려와 투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전교사 1만여 명, 31사단 1,454명 등 모두 1만5천여 명의 계엄군이 광주에 이미 있었다. 하지만 신군부 수뇌부는 이들이 진압작전에 소극적이라고 판단한 것인지 20사단 병력 4천여 명을 광주에 끌어들였던 것이다. 20사단은 공수부대와 호흡을 맞춰 충정훈련을 해왔기 때문에 시위진압에 최적화된 부대였다. 공수부대와 달리 정규군 20사단은 한미연합사의 승인을 받아야 이동할 수 있었다. 한미연합사는 22일에야 20사단의 광주이동을 사후 승인했다. 20사단은 하루 전인 21일 광주로 이동한 것이다.
  • 도청 앞 집단 발포
  21일 오후 1시경, 도청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애국가가 흘러나왔다. 애국가가 끝나는 순간 공수부대의 M16 총구가 시위대를 향해 불을 뿜었다. 이때 발포 병사들은 ‘횡대 무릎 쏴’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만약 시민들이 먼저 발포했다면 병사들은 총탄을 피하기 위해 골목으로 자신의 몸을 숨기거나, 사격을 하더라도 몸을 낮춘 상태의 ‘엎드려 쏴’ 자세를 취했을 것이다. 그러나 질서있게 ‘횡대’로 대열을 유지한 채 자신의 몸을 노출시킨 상태였다. 누군가 조직적으로 사격상황을 통제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자세다.

  시위대 앞줄에 서 있던 몇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 한 가운데서 쓰러졌다. 순식간에 수만 명의 사람들이 금남로에서 사라졌다. 옆 골목 건물 뒤로 피한 것이다. 총성이 멎자 골목에서 사람들이 나와 희생자를 도로 밖으로 재빨리 끌어냈다. 바닥에는 피가 흥건했고,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일부는 병원으로 급히 옮겨졌다. 잠시 후 골목에 몸을 숨겼던 시민들이 다시 금남로 한 가운데로 나와 도로가 가득 찼다. 이번에는 도청 부근 높은 건물 위에서 저격병들이 조준사격을 했다. 시위대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또 쓰러졌다. 다시 시위대는 순식간에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오후 4시경 공수부대가 도청 사수를 포기하고, 조선대로 퇴각할 때까지 이런 상황이 여러 차례 반복됐다.

  집단발포에 앞서 이날 오전 9시 25분, 전옥주, 김범태 등 시민 대표 3명은 장형태 도지사에게 공수부대 철수를 요구했다. 공수부대 철수를 건의하겠다는 도지사의 말을 믿고 수만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다. 정오가 넘도록 공수부대는 철수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민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냈다. 마침내 동요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 직전, 시위대가 공수부대 저지선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시위대의 거센 위세에 계엄군이 뒤로 밀려났다. 이때 엉겁결에 후진하던 계엄군의 장갑차 바퀴에 깔려 공수대원 1명이 사망하였다. 곧이어 계엄군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어냈다.

  금남로는 삽시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시민들로 가득 찼던 거리는 순식간에 텅 비었고, 적막에 빠졌다. 쓰러진 사람들의 핏물이 흥건히 아스팔트를 적셨고, 부상자들의 신음이 금남로에 나뒹굴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셀 수조차 없이 많은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졌다. 시민들은 넋을 잃었다. 잠시 후 끓어오르는 분노와 공포감에 치를 떨었다. 첫 집단 발포 직후 금남로 주변 높은 건물 옥상에 올라간 저격병들이 비무장 상태의 시민들에게 지속적으로 조준해서 사격을 하였고, 그때마다 시민들이 쓰러졌다.

  이날 도청 앞 집단 발포를 명령한 자는 누구인가? 몇 명이나 희생당했는가? 이 집단 발포로 몇 명의 시민이 살상 당했는지는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지금까지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 내용을 종합해 볼 때 이곳 현장에서 최소 54명 이상이 총격으로 숨지고, 500명 이상 총상을 입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항쟁 1년 후 육군본부가 진압작전에 참가한 공수부대의 상황 일지를 종합 검토해서 편찬한 자료집 〈소요 진압과 그 교훈〉에는 총과 실탄이 시위대에게 피탈당한 최초의 사례를 5월 21일 오후 2시 30분경 나주경찰서 삼포지서라고 특정했다.

  그 시각 이후부터 시위대가 화순이나 나주지역의 각 경찰서나 지서에서 획득한 무기로 스스로를 무장한 것이다. 2018년 국방부 조사에 따르면 도청 앞 전일빌딩 10층에서 발견된 총탄자국은 ‘헬기사격에 의한 것’이라고 확인됐다. 최초 발포상황, 그 직후 지속적인 조준사격, 헬기사격 등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발포가 아니라 ‘발포 명령’에 따라 총을 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군 당국은 당시 작전문서들을 조작하거나, 왜곡 변조해서 발포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렸다.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발포명령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한걸음 더 나아가 북한특수부대가 침투해서 저지른 발포라는 ‘가짜뉴스’마저 확산시키고 있다. 광주역 발포와 더불어 도청 앞 집단발포 명령자를 밝히는 일은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의 핵심 사항이다.
  • 시민군 탄생과 공수부대 철수
  도청 앞에서 오후 1시경에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시작되자 격분한 시민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장을 서둘렀다. 시위대 중 일부가 광주 근교로 차량을 향했다.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지의 경찰서나 지서에 보관된 예비군 무기고가 목표였다. 전남지역 각 군의 지서에는 겨우 1~2명 정도씩 밖에 경비 경찰이 남지 않았다. 광주 시위진압을 위해 동원됐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무기 획득은 어렵지 않았다.

  시위대는 화순 탄광에서 광부들의 도움으로 다량의 다이너마이트와 뇌관을 확보했다. 다른 데서도 카빈총과 실탄을 노획했다. 획득한 무기들은 즉시 광주 시내로 반입되어 청년들에게 분배되었다. 이렇게 무장한 시위대는 자연스럽게 ‘시민군’으로 불렸다. 시민군은 광주공원의 시민회관 앞을 본부로 삼아 대열을 정비했다.

  무장한 시민군이 금남로에 나타난 시각은 오후 2시가 넘어서였다. 나주나 화순에서 무기를 가지고 오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10여 명씩 조를 나누어 부대를 편성했다. 각 조별로 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광주 시내 주요 지점에 배치되었다. 시가전은 도청을 중심으로 전남대 의대 근방, 노동청, 공원, 금남로 등지에서 벌어졌다. 특수 훈련을 받은 정예 공수부대와 급조된 일반 시민군의 전투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21일 오후 금남로에서 시민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 공수대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7시 30분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방송을 통해 군의 ‘자위권 보유’를 천명하는 경고문을 발표했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들은 ‘자위권 보유’ 천명이 ‘발포 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계엄군은 봉쇄선에 접근하는 무장 시위대만이 아니라, 무장하지 않은 시민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였다.

  광주 시내 병원들은 총상 환자가 넘쳐났다. 버스나 소형차들이 부상자나 시신을 병원으로 실어 날랐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가정주부를 비롯해, 여학생, 아가씨들은 물론 어린아이까지 팔을 걷어 부치고 헌혈하기 위해 병원으로 달려왔다. 부족하던 피가 넘쳐났다. 이날 광주 시내에 거주하던 미국인 약 200명은 송정리에서 군용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피신했으며, 송정리 공군기지에 주둔해 있던 미 공군은 그곳의 모든 비행기를 군산과 오산비행장으로 이동시켰다.
  • 항쟁의 확산
  5월 21일의 도청 앞 집단 발포를 계기로 항쟁은 광주 시내를 벗어나 전남지역으로 순식간에 번져 나갔다. 항쟁의 불길이 화순, 나주, 함평, 영암, 강진, 무안, 해남, 목포 등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그 지역 청년들이 대거 광주로 들어와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광주 시위대가 대거 시외로 나가서 광주의 처참한 상황을 본격적으로 그 지역 주민들에게 알렸다. 고립된 채 광주에서만 부글부글 끓던 항쟁이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간 것이다. 그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뜨거웠다. 광주에서 대학과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전남이 고향이었다. 때문에 광주와 전남의 정서적인 유대감은 매우 깊었다.

5. 5월 22일~26일

  • 봉쇄작전
  21일 오후 5시경 광주시내에서 퇴각한 공수부대는 27일 항쟁이 끝날 때까지 20사단, 31사단과 함께 광주에서 외부로 통하는 도로 6군데를 완전히 봉쇄했다. 신군부가 가장 우려한 것은 광주 시위가 서울과 부산 등 지방 대도시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전남 서남부지역으로 시위대가 진출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느슨했던데 비해 서울이나 부산 쪽은 철저하게 차단하였다. 광주에서 서울 등 다른 도시로 향하는 길은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그리고 철도, 항공편이 가능했다. 광주공항은 처음부터 군이 장악했고, 철도는 시위대에 의해 이미 막힌 상태였다. 20사단 1개 대대가 호남고속도로 광주톨게이트를 차단했으며, 동광주톨게이트는 광주교도소에 주둔한 3공수여단이 막았다. 남쪽 화순방향은 도청 앞에서 퇴각한 7‧11공수가 봉쇄했다. 계엄군은 봉쇄선에 접근하는 자들에게 무차별 난사로 대응했다.

  봉쇄작전에서 특이한 사항은 공수부대와 20사단 차단지역에서 민간인 희생자가 31사단 차단지역보다 훨씬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3공수 주둔지인 광주교도소와 11공수부대의 주둔지인 주남마을에서는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고 불릴 만큼 10~20명 정도씩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다. 20사단 차단지역인 광주와 나주 사이에서도 21일 밤중에 10여 명의 시민들이 한꺼번에 사살 당했다. 서울에서 광주에 투입한 ‘충정부대’에서만 유달리 이렇게 희생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3공수여단은 광주교도소에 주둔하면서 강력하게 고속도로 봉쇄작전을 펼쳤다. 21일부터 23일 사이에 10명이 훨씬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희생자가 발생했고 시신은 교도소 뒷마당에 가매장됐다. 희생자들 대부분은 교도소 옆 고속도로나 국도를 경유해서 광주를 빠져나가려는 사람들이었다. 계엄당국은 이 희생자들이 ‘교도소를 습격하려 했다’고 왜곡했다. 하지만 실제 밝혀진 희생자 가운데는 21일 저녁 무렵 광주에서 농기구를 구입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담양 대덕마을 주민들도 있었고, 5살짜리 딸과 아내를 자신의 화물자동차에 태우고 22일 아침 고향 진도로 향하던 일가족도 고속도로 입구에서 총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봉쇄작전은 어떠한 사전예고도 없이 갑자기 시행되었다. 만약 차단 사실을 사전에 충분히 알렸더라면 이렇듯 무고한 민간인 희생은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21일 밤 나주에서 광주시내로 진입하던 버스 한 대가 광주 입구 효천역 부근 20사단 봉쇄지점에서 집중사격을 받아 10여 명이 몰살당한 사건도 그런 경우다. 당시 뒤따르던 차에 탔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만약 봉쇄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봉쇄선에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24일 오후 1~3시 사이에는 송암동 야산에 매복하여 봉쇄작전을 수행 중이던 전교사 보병학교 교도대가 주남마을에서 광주비행장으로 이동하는 11공수여단을 무장한 시민군으로 오인하여 90밀리 무반동총과 크레모아 등으로 장갑차와 군용트럭을 폭파해버린 오인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11공수대원 9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11공수는 곧바로 계엄군의 잘못 때문인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11공수대원들은 이 사건과 전혀 상관이 없는 근처 송암마을 주민들을 상대로 분풀이 학살을 자행하였다.

  집안에서 장기놀이를 하던 마을 청년 3명을 밖으로 끌어내 철길 부근에서 사살해버렸고, 하수구에 겁에 질려 숨어있던 50세 여인에게도 총을 난사해 숨지게 하였다. 보안사에서는 이 사건이 계엄 수뇌부의 강경진압에 불만을 품은 ‘군사반란’으로 의심하여 은밀하게 조사했지만 전교사와 충정부대(공수부대, 20사단)와의 사이에 ‘지휘계통의 혼선으로 인한’ 오인사격으로 밝혀졌다.
  • 절대공동체
  5월 22일, 항쟁 5일째 날이 밝았다. 믿기지 않는 승리였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였다. 벅찬 감동이 도청 앞 광장에 넘실거렸다. 서로 얼싸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계엄군이 물러난 광주는 폭력과 살상이 난무하던 상황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비록 외곽이 봉쇄된 한정된 공간이었지만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시민들은 도청 앞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길거리에 방치된 부서진 차량을 치우고, 금남로를 적셨던 핏자국을 깨끗하게 씻어냈다.

  광주공원에서는 시민군들의 재편성 작업이 시작됐다. 아침 일찍 도청을 접수한 시민군은 계엄군이 버리고 간 물건들로 어수선한 내부를 정돈한 다음, 도청을 본부로 정하고 1층 서무과를 작전상황실로 사용했다. 상황실에서는 차량통행증과 시내 주유소의 유류를 보급받기 위한 유류보급증, 상황실 출입증 등을 발부하는 한편, 외곽 지역에서 방위를 맡고 있던 시민군들과 연락 체계를 구축하였다. 또한 기동순찰대를 편성하여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출동하도록 대기시켰다.

  시민들은 빠른 속도로 질서를 회복해 가고 있었다. 시장과 상점들이 정상적으로 문을 열기 시작했고, 사회복지단체에 식량 공급도 이뤄졌고, 전기‧수도 등은 관련 공무원들의 지원으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결됐다. 수많은 부상자들 때문에 혈액 부족으로 곤란을 겪던 병원들도 시민들의 헌혈로 혈액이 남아돌았다.

  경찰에 의한 치안유지 활동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이나 신용금고 같은 금융기관에서는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으며, 금은방 귀금속 상점에서도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에 발생한 범죄율은 오히려 평상시보다 훨씬 낮았다. ‘수습대책위원회’나 시민군에게 필요한 자금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성금으로 해결되었다. 1천여 명에 이르는 시민군들의 매끼 식사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어다 준 주먹밥 등으로 해결되었다.

  시민들은 이 기간 동안 매일 도청 앞 광장에 모여 향후 어떻게 대처할 지를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행동방침을 정했다. 분수대 위에는 누구든 올라가서 발언할 수 있었다.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서로의 의견을 모았고, 거기서 결정된 바에 따라 스스로 행동에 옮겼다. 봉쇄기간 동안 광주시민들은 직접 민주주의 원리에 바탕을 둔 완벽에 가까운 자치공동체를 경험한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헌신하는 이런 모습은 인류역사가 도달할 수 있는 높은 단계의 집단적 도덕성을 보여주었던 시기로 평가된다. 5‧18 기간 중 공동체의 절대위기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나타난 이런 역설적인 현상을 학자들은 ‘절대공동체’, ‘대동세상’, 혹은 ‘에로스 효과’라고 불렀다. 역사의 특별한 시기에 짧지만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이런 소중한 체험은 광주시민들의 집단기억 속에 깊게 새겨진 채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 수습대책위원회
  22일 낮 12시 30분경, 신부‧목사‧변호사‧교수‧정치인 등 20여명으로 ‘5‧18 일반수습대책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이어서 오후 9시경 학생들을 중심으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도 구성되었다. 지역의 유지급 인사들이 중심이 된 ‘일반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사 측과의 협상 활동을 했으며, ‘학생수습대책위원회’는 대민 업무를 맡았다. 학생수습위는 장례반, 홍보반, 차량 통제반, 무기 수거반으로 나뉘어 활동했다.

  일반 수습위는 토론 끝에 계엄 당국에 제시할 7개 항목의 요구사항을 결정했다.

1. 계엄군의 과잉 진압 인정
2. 구속 학생 및 민주 인사 연행자 석방
3. 시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 보상
4. 발포 명령 책임자 처벌과 국가 책임자의 사과
5. 사망자 장례식은 시민장으로 할 것
6. 수습 후 시민 학생들을 보복하지 말 것
7. 이상의 요구가 관철되면 무기 자진 회수 및 반납 무장 해제
  일반 수습위원회는 위 7개 요구사항을 가지고 협상대표 8명이 전남북계엄분소를 찾아가 협상을 벌였다. 계엄 당국의 입장은 강경했다. 과잉 진압에 대해 시민들이 과격하게 시위를 했기 때문이라고 시민 대표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을 보이면서 ‘조건 없는 무기 반납’만을 요구했다. 첫 협상에서 계엄 당국은 시위 도중에 붙잡혀 온 사람들 일부를 선별하여 석방했다.

  이날 오후 5시 30분경, 1차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시민 대표들이 도청 앞 광장에서 수만 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협상보고대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협상 대표 일부가 계엄 당국의 강경 입장을 전하면서 ‘무기 반납과 군인에게 치안 유지를 맡겨야 한다’고 발언하자, 듣고 있던 시민들이 크게 반발했다. 시민들이 납득할 만한 사태 수습 방안을 계엄 당국이 먼저 제시한 후 무기를 반납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고, 그 주장이 큰 호응을 얻었다. 그 후 이어진 계엄 당국과의 몇 차례 협상에서는 ‘무기 반납’이 가장 큰 쟁점이었다. 계엄군의 강경 기조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민 대표들의 입장은 더욱 곤혹스러워졌다.

  신군부 지휘부는 22일 오전 10시 시위진압에 소극적인 전교사령관 윤흥정 중장을 소준열 소장으로 전격 교체했다. 이에 앞서 21일 오후 4시경에는 형식적이나마 31사단장이 가지고 있었던 공수부대의 작전통제권을 전교사령관에게로 전환시켰다. 이 두 가지 조치를 통해 신군부는 지금까지 강경진압 방침에 보이지 않게 반발하며 갈등을 빚었던 전교사령관과 31사단장을 형식적인 지휘라인에서도 완전히 배제시켰다.
  •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23일, 시 외곽 지역에서는 간헐적으로 총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아직 광주시내는 승리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분위기였다. 시민들은 이날도 자발적으로 길거리를 청소했으며, 시장 주변에서는 아침 일찍부터 아주머니들이 길가에 솥을 내다 걸고 밥을 지어 밤샘 경계 근무를 서는 시민군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상가들도 띄엄띄엄 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전 10시경, 도청 앞 광장은 5만여 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상무관에는 희생자들의 시신을 담은 관들이 가지런히 배열됐고, 아직 입관하지 못한 시신들 위에는 무명천이 덮였다. 입구에는 분향대가 설치되어 향이 피워졌고, 수많은 시민들이 줄을 지어 참배를 기다렸다.

  한편 지난밤 구성된 학생수습대책위원들은 일반수습대책위원들이 모두 귀가한 상태에서 밤새워 대민 질서, 홍보, 장례, 무기 회수 문제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다른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무기 반납 문제에 대해서는 수습대책위원회 내부에서도 팽팽한 시각차를 보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무기 반납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시민들 사이에서 ‘계엄 당국의 납득할 만한 조처가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무기를 회수할 경우 계엄군과 협상조차 해보지 못하고 진압당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다. 오후 3시 도청 앞 광장에서 열린 ‘제1차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서 시민들의 단결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져 나왔다.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무기 회수에 앞서 계엄군에 대한 방어 태세를 먼저 갖춰야 한다는 의견도 큰 호응을 얻었다. ‘민주 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는 23일부터 26일까지 하루에 1~2회씩 모두 5차례 열렸다. 이 대회를 통해 ‘무기 반납’ 등 협상 의제에 대한 체계적인 의견수렴은 물론, 일반수습대책위원 교체를 통한 협상력 강화, 대학생 시민군 자원봉사자 모집, 시민 생활의 질서 유지 활동 등을 본격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었다.

  수습대책위원회가 나서서 ‘무기 회수’에 앞장섰다. 25일까지 회수된 총기는 모두 4,500여 정이었다. 전체 5,000여 정 가운데 90% 정도가 회수된 것이다. 무기 회수는 ‘양날의 칼’이었다. 상당수의 시민들은 안전사고를 우려해 당장 무기를 회수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다. 그렇다고 회수된 총기를 계엄당국의 요구대로 무조건 반납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수습위원회는 계엄군에게 반납하는 조건과 방법은 잠시 미룬 채 무기 회수를 진행했다. 회수된 무기는 우선 도청 지하실 임시 무기고에다 쌓아 두었다.

  그런데 시민 안전을 명분으로 추진했던 무기 회수는 역설적으로 계엄군의 공격에 무방비 상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무장한 시민군의 숫자도 무기 회수 정도에 따라 약 5,000명에서 500명 정도로 10분의 1로 줄었다. 외곽을 방어하는 시민군들은 도청 내 수습대책위의 의견 대립과 관계없이 대부분 무기 반납을 거부한 채 위치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시민들의 자기희생적인 도덕성과 자치 능력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 온건파와 항쟁파
  5월 24일, 항쟁 7일째로 접어들면서 수습대책위원회 내부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이날 오후 1시경 도청 상황실에서 김창길 위원장의 사회로 ‘학생수습위원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온건파와 대립하여 항쟁파로 분류되던 김종배, 허규정 등의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이 채택됐다.

첫째, ‘광주사태’에 대하여 정부는 불순분자들과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현재의 광주항쟁은 전 시민의 의지였으므로 폭도로 규정한 점을 해명 사과하라.
둘째, 사망한 사람들의 장례식을 시민장으로 하라.
셋째, 구속된 학생·시민 전원을 석방하라.
넷째, 피해 보상을 전 시민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시행하라.
  학생수습위는 항쟁파가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온건파가 한걸음 물러섰다. 일반수습대책위에도 비슷한 변화가 생겼다. 무조건 무기 반납을 주장하던 온건파 대신 재야민주인사 및 천주교 신부들로 교체되었다. 수습대책위 내부가 의견 대립으로 흔들리자 이를 틈타 군의 정보 요원들이 도청에까지 잠입하여 교란 작전을 시도했다. 25일 아침 8시, 도청 내부에서 ‘독침 사건’이 발생했다. 독침사건의 주인공은 보안사가 시민군을 교란시키기 위해 침투시킨 인물로 후일 밝혀졌다. 계엄군이 광주 외곽을 둘러싸고 봉쇄 작전을 펼치는 동안 광주시민들은 왜곡보도를 일삼는 국내 언론과 달리 외신기자들에게는 자유롭게 취재할 수 있도록 도왔다.
  • 항쟁지도부 등장
  25일 밤 10시, 온건파와 갈등 끝에 항쟁파 중심으로 ‘항쟁지도부’가 새롭게 탄생했다. 항쟁지도부는 학생수습대책위의 일부 항쟁파와 청년운동권, 그리고 무장 투쟁 국면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했던 기층 민중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항쟁지도부는 즉각 무기 회수를 중단시켰다. 온건파의 ‘아무런 조건 없이 총기를 내려놓고 도청을 비워버리자’는 주장과 달리 ‘시민들의 투쟁역량을 재정비하여 계엄군과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겠다’는 생각이었다. 각자 역할을 새롭게 분담하고, 시민 생활의 정상화를 도모하였다. 그들은 ‘투쟁과 협상을 병행’하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했다.

  26일 오전, 항쟁지도부는 시민군의 무장 전열부터 재정비했다. 기존 기동순찰대를 해체하고 기동타격대로 새롭게 편성했다. 만약 계엄군이 공격해 오면 도청 지하 무기고에 보관되어 있는 다이너마이트로 대항하겠다며 계엄당국과 협상을 시도했다. 그러나 항쟁지도부가 협상의 최후 수단으로 삼았던 시민군의 다이너마이트는 이미 계엄군의 손에 의해 쓸모가 없게 되어버린 상태였다. 이틀 전 24일, 한밤중에 온건파 지도부의 묵인 아래 계엄군 폭발물 전문 요원이 도청 지하 무기고에 몰래 들어와 다이너마이트와 수류탄 뇌관을 전부 제거해버렸기 때문이다. 항쟁지도부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항쟁지도부는 대치 상황이 장기화될 것에 대비하였다. 광주시장과 전남도의 국장급 공무원들에게 출근하도록 하여, 머리를 맞대고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여러 가지 사항을 강구하였다. 광주시가 책임지고 매일 쌀 한 가마씩과 부식 및 연료 등 생필품을 생계가 어려운 시민들에게 공급토록 하고, 시내버스가 정상 운행될 수 있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구했다. 희생자 시신을 입관할 관 40개와 구급차 1대도 마련키로 하고, 장례는 ‘도민장’으로 치르자는데 합의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이때 무력진압 방침에 대해 미군과 협의를 마치고, 모든 준비를 완료한 상태였다. 신군부 수뇌부는 25일 낮 12시 15분, ‘상무충정작전’ 디데이를 27일 새벽 0시1분 이후 실시하도록 결정했다. 신군부가 상무충정작전을 결정한 25일 낮 12시 15분은 전남 도청에서 항쟁지도부가 아직 탄생하기 전이었다. 항쟁지도부는 25일 밤 10시에 만들어졌다. 신군부는 항쟁파의 도청 장악 때문에 진압작전을 서둘렀다고 주장했지만 그들의 주장은 거짓이다. 25일 낮 황영시 육본참모차장과 김재명 육본작전참모부장은 작전명령서를 가지고 직접 광주에 내려와 전교사령관에게 전달했다. 25일 오후 7시에는 전두환의 제안으로 최규하 대통령이 광주에 내려와 선무 방송을 했다. ‘계엄 당국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마지막까지 광주 시민을 설득해 평화적으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항쟁파의 저항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명분 쌓기였다.

6. 죽음의 행진과 26일 밤

  5월 26일 새벽 4시, 광주 외곽에서 계엄군이 탱크를 앞세우고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소식이 무전기를 통해 도청 상황실에 들어왔다. 27일 새벽 도청 소탕작전을 앞두고 시민군의 반응을 미리 떠보고, 교란시키기 위한 ‘기만작전’이었다. 계엄군의 탱크는 시민군이 설치한 바리게이트를 깔아뭉개고 1㎞쯤 밀고 들어와 농성동 한국전력 앞길에 진을 쳤다. 새벽 도청에는 비상이 걸렸다. 청년들이 아닌 나이 든 수습위원들이 계엄군 진입을 막겠다고 앞장섰다. 이성학 장로, 김성용 신부 등 17명이 도청을 출발해 농성동 계엄군을 향해 약 4㎞ 정도를 무거운 침묵 속에 발걸음을 옮겼다. 이른바 죽음을 각오하고 온몸으로 계엄군의 진입을 막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나선 ‘죽음의 행진’이었다. 김성용 신부 등 11명은 그 길로 전라남북계엄분소로 가서 마지막 협상을 진행했다. 계엄 당국은 26일 자정까지 모든 무기를 버리고 도청을 비우라고만 요구했다. 무조건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이었다.

  26일 오후 계엄군의 진입작전이 임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항쟁지도부는 두 차례에 걸쳐 민주수호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었다. 시민들은 평화적인 수습 노력을 외면한 채 대량 살상이 예상되는 유혈 진압을 강행하겠다고 위협하는 계엄군의 일방적이고 고압적인 태도를 격렬하게 규탄했다. 이 궐기대회에서 채택한 7개 항으로 된 ‘80만 광주 시민의 결의’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할 하고자 했던 시민들의 의지를 오롯이 담고 있다.

첫째, 이번 사태의 모든 책임은 과도정부에 있다. 과도정부는 모든 피해를 보상하고 즉각 물러나라.
둘째, 무력 탄압만 계속하는 명분 없는 계엄령은 즉각 해제하라.
셋째,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는다.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넷째, 구속 중인 민주 인사를 즉각 석방하고, 민주 인사들로 구국 과도정부를 수립하라.
다섯째, 정부와 언론은 이번 광주의거를 허위 조작, 왜곡 보도 하지 말라.
여섯째,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피해 보상과 연행자 석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요구한다.
일곱째, 이상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우리 80만 시민 일동은 투쟁할 것을 온 민족 앞에 선언한다.
  이 결의문은 초기에 ‘수습’에만 초점을 맞췄던 협상안과 달리 ‘계엄 해제, 전두환 처단, 그민주정부 수립’ 등을 요구했다. 항쟁의 성격을 ‘민주화운동’으로 분명하게 표방한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광주 시민의 힘만으로 이런 주장이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시민들은 최후까지 결사 항전을 결의했으며, 그날 오후 마지막 궐기대회 자리에서 청년과 대학생 중심으로 광주를 지킬 지원자를 모집했다. 궐기대회가 끝나자 스스로 YMCA에 모인 사람들이 150여명이나 되었다. 이중 80여 명은 총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들이었고, 60여 명은 군 경험이 전혀 없는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었으며, 여성도 10여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한편 궐기대회 직후 항쟁지도부 대변인 윤상원은 도청에서 외신기자 회견을 열어 ‘미국이 나서서 도청 유혈진압을 중지시켜 달라’는 의견을 밝혔다. 외신기자를 통해 주한 미 대사와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한 마지막 협상을 시도했지만 좌절되었다.

  26일 밤 도청 안에서는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한 것을 예상하고 일부 사람들이 도청을 빠져 나갔다. 항쟁지도부도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만류하지 않았다. 지도부는 이미 궐기대회에서 최후까지 싸우겠다는 사람만 남아달라는 말을 전한 바 있었다. 고등학생이나 여성들에게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간곡히 권유했다. 어린 학생들은 살아남아서 ‘우리가 왜 마지막까지 싸울 수밖에 없었는지를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사 항전을 앞둔 도청 내 시민군의 분위기는 비장하고, 결연했다.

7. 5월 27일, 새벽의 마지막 불꽃

  계엄군은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광주시와 전남지역의 전화를 모두 끊어버렸다. 김종배, 박남선 등 항쟁지도부는 26일 오후 궐기대회가 끝난 후, YMCA에 자원해서 모인 청년 학생 150여명을 기존의 시민군과 섞어 전투조로 새롭게 편성하였다. 자정이 넘어 새벽 2시쯤 외곽지역 순찰을 돌던 기동타격대의 시야에 계엄군의 진입 움직임이 포착됐다. 순찰조의 무전 보고를 통해 계엄군 진입이 확인되자 항쟁지도부는 도청을 중심으로 YMCA, YWCA, 전일빌딩, 계림국민학교 등 주요 방어 지점에 새벽 3시경까지 시민군 배치를 완료했다.

  항쟁지도부는 계엄군 진입 사실을 시민들에게 알리기로 결정했다. 박영순은 도청 내 방송실에서 최후의 방송을 시작했고, 그 방송은 도청 옥상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를 통해 광주 전역에 울려 퍼졌다. 집 안에 있던 시민들은 한 걸음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공포감이 짙은 안개처럼 도심을 감쌌다. 그날 밤 그녀의 절규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사람들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 목소리를 들었던 시민들은 청년 학생들이 처절하게 죽어 가고 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에 오래도록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주십시오…….”
  시민군은 도청 전면과 측면 담장을 따라 늘어 선 방호 초소마다 2~4명씩 한 조가 되어 배치되었다. 본관 건물 안에서는 1층부터 3층까지 정문을 향한 복도에서 유리창 넘어로 분수대 광장 쪽을 내려다보았다. 도청과 전일빌딩 사이 광장에는 칠흑 같은 어둠만 가득했다.

  3공수여단 특공조는 4개조로 나뉘어 도청을 포위했다. 새벽 4시 무렵 교회당 종소리와 함께 총성이 울렸다. 도청 뒷담을 넘어 침투한 특공조가 맹렬히 총을 쏘아댔고, 사방에서 총탄이 쏟아졌다. 특공조는 도청 내부로 돌격해 들어간 다음 옥상부터 훑어 내려왔다. 각 방의 문을 걷어차면서 닥치는 대로 총을 쏘았고, 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총소리와 비명이 난무한 가운데 인기척이 나는 곳에 무조건 총격을 가했다. ‘폭도 소탕 작전’, 바로 그것이었다.

  오전 5시 10분경 동이 터오기 시작할 무렵 YMCA, YWCA, 전일빌딩, 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진압 당했다. 불과 1시간 30분 만에 항전은 끝났다. 완전한 소탕을 확인한 3공수 특공조는 20사단에게 도청을 인계한 후 7시경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광주비행장으로 돌아갔다.

  항쟁의 피로 붉게 물든 광주의 아침이 밝았다. 생존자는 ‘총기 소지자’, ‘특수 폭도’, ‘극렬분자’ 등으로 분류되어 군부대로 이송되었다. 이로써 1980년 5월 열흘간에 걸친 광주 민중의 무장 투쟁은 막을 내렸다.

  27일 사망한 시민은 약 25명으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도청과 그 주위에서 진압작전 당시 사망한 사람은 17명으로 대부분 계엄군이 쏜 M16 소총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날 아침 도청에서 체포되어 연행된 사람은 약 200명 정도였다.

  5‧18 기간 중 피해자는 총 5,517명으로 밝혀졌다.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사망자 155명, 상이 후 사망자 110명, 행방불명자 81명, 부상자2,461명, 연행구금부상자 1,145명, 연행·구금자 1447명, 재분류 및 기타 118명 등이다.
  • 사법부 판결
  1980년 신군부는 계엄 상태의 군사 재판에서 광주 시민들의 저항을 ‘국가의 헌법을 문란하게 한 내란’이라고 가혹하게 처벌했다. 2,522명을 검거했고, 훈방 1,906명, 군법회의 회부 616명, 그 가운데 212명이 불기소 처분되었고, 404명이 군사 재판을 받았다. 1981년 3월 31일 대법원은 83명에 대하여 계엄법 위반, 내란주요임무종사, 살인 등의 죄목으로 형을 확정했다. 그러나 형이 확정된 지 3일 만인 4월 3일, 관련자 83명 전원에 대해 특별감형, 특별사면 또는 복권조치가 취해졌다. 사형선고를 받은 정동년은 무기로, 상황실장 박남선 등은 징역 20년으로 감형됐고, 그해 12월 크리스마스까지 형 집행정지 등으로 모두 풀려났다.

  17년 후인 1997년 대법원은 광주 시민의 저항은 ‘내란 행위가 아니라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 행위’라는 1981년과 전혀 다른 정반대의 판결을 내렸다. 신군부가 광주 시민을 살상한 것은 ‘내란’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판시했다.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 유혈진압에 대해서는 ‘광주 시위가 타 지역으로 확산되면 정권 장악이라는 목적 달성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신군부가 자행한 내란 목적 살인’이라고 규정했다.

  신군부가 ‘5.17 내란’을 일으켰고, 광주시민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5‧18민주화운동’으로 용기 있게 맞섰다고 본 것이다.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게 위협을 가해 ‘그 권능 행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헌법을 수호할 최후의 수단은 국민들의 결집된 저항일 수밖에 없다. 27일 새벽 신군부의 내란에 반대해 결집했던 광주 시민들은 ‘헌법기관에 준하여 국가가 나서서 보호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리고 광주 시민들의 저항 행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 행위’가 아니라 신군부의 내란 행위를 저지해 ‘국헌을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평가했다.

  대법원은 27일 새벽 전남도청과 광주 시내 일원에서 벌어진 계엄군의 발포 행위에 관련된 책임자 5명을 ‘내란 목적 살인죄’로 처벌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참모차장 황영시, 특전사령관 정호용, 국방부장관 주영복, 계엄사령관 이희성 등이 바로 그들이다. 또 대법원은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 작전은 신군부 지휘부가 도청의 무장 시위대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시위대와의 교전이 불가피해 필연적으로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작전을 강행하도록 명령한 것은 살상 행위를 지시 내지 용인한 것이라고 판시했다. 이 작전에는 ‘발포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이런 이유로 10일간의 항쟁 기간 중 유일하게 27일 새벽 광주 재진입 작전에만 ‘내란 목적 살인죄’를 적용하였다.
  • 5‧18민주화운동과 미국

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의 입장

  우리나라 군부대의 작전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미국은 광주에서 자행되고 있는 만행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었을까? 광주의 비극이 최고조에 달했던 5월 22일 미국 국방성 대변인 토마스 로스가 발표한 성명에서 그 윤곽을 읽을 수 있다. 토마스 로스 대변인은 “존 위컴 주한 유엔군 및 한·미연합사령부 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며 “지금까지 북한군이 한국의 현 상황을 이용하려 한다는 움직임이나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이날 미 국무성 대변인 호딩 카터는 ‘광주사태’에 대한 성명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미국은 한국의 남쪽에 위치한 광주의 소요사태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표하며 이 사태와 관련된 모든 당사자에게 최대한 자제와 대화를 통해서 평화적인 사태수습방안을 모색하도록 촉구하는 바이다. 불안상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가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 미국정부는 현재의 한국사태를 이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의 기도에 대해서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의무에 의거, 강력히 대처할 것임을 재강조하는 바이다.”

  이날 오후, 백악관에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 고위정책조정위원회(PRC)는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조기경보기 2대와 필리핀 수빅만에 정박 중인 코럴시 항공모함을 한국 근해에 출동시키기로 결정했다.

나. 한·미연합사의 작전통제권 이양

  미국은 이미 1980년 5월 16일에 20사단의 작전 통제권을 한국군에 이양하였다. 1980년 5월 16일, 육군참모총장 이희성은 존.A.위컴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악화에 따라 수도권 질서유지를 위하여 20사단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자 연합사령관은 요청전문을 접수했음을 확인한 후 “귀하의 요청을 승인한다(Your request is approved)”는 승인 문서를 한국군에 전달했다. 또한 신군부가 20일에는 20사단을 원래의 목적이 아닌 ‘광주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광주로 보내도 되겠느냐’며 한미연합사에 ‘부대이동에 관한 문의’를 하였다. 이에 위컴은 ‘워싱턴에 있는 상관들과 협의한 후 동의(agreed)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5월 23일, 육군참모총장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소요사태 확대에 대비, 광주지역 질서유지를 위해 5월 23일 12:00부로 33사단 1개 대대의 작전통제권 이양을 요청하는 부대사용 협조문”을 보냈다. 그러자 연합사령관은 즉각 “승인”한다는 전문을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에게 보냈다. 이에 따라 33사단 101연대 제2대대는 23일 12시 25분에 성남비행장에서 광주투입작전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나 실제 광주에는 투입되지는 않았다.

  미국행정부가 남침의 징후가 전혀 없었는데도 ‘광주사태가 더 격화될 경우 남침할 수도 있다’는 식의 경고를 계속한 것은 일반 국민이 5·18민주화운동을 불안하게 생각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광주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무력진압을 정당화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미국은 12·12쿠데타 이후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통해 국회해산, 비상기구설치 등 내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직·간접으로 지원·옹호했다. 또한 신군부의 불법적인 내란에 저항했던 광주시민을 진압하기 위해 자행한 학살을 방조 혹은 묵인했다는 비판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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