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컨텐츠로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1988년 형성된 여소야대 정국은 12·12사건과 5·18민주화운동을 다시금 정치·사회의 쟁점으로 부상시켰다. 시민사회운동단체들은 연일 광주학살의 책임자 처벌과 5공화국의 비리 규명을 요구하는 집회와 시위를 벌였다.

이에 국회는「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광주청문회'에서는 그동안 일반 국민들이 볼 수 없었던 5·18민주화운동 현장 화면이 가감 없이 공중파를 통해 생중계됨으로써 국민들을 경악하게 하였다. 신군부가 저지른 반인륜적 만행의 진상을 전 국민들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대야당이 탄생하고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된 뒤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사진은 5·18관련 광주의 원로들인 송기숙, 조비오, 故 명노근, 故 윤영규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거대야당이 탄생하고 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가 구성된 뒤 청문회가 개최되었다.
사진은 5·18관련 광주의 원로들인 송기숙, 조비오, 故 명노근, 故 윤영규

국회광주특별위원회 및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고 있는 신군부 출신의 정호용 의원

국회광주특별위원회 및
청문회에서 증언을 하고 있는
신군부 출신의 정호용 의원
청문회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워지자 노태우 정부는 1988년 11월 전두환의 사과 성명 발표와 백담사 은둔, 대통령의 대국민 특별담화 발표와 12월 양심수의 석방 등의 유화책을 시도해 종결지으려 했다. 노태우 정부는 정국의 반전을 기하기 위해 공안정국을 조성하면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주요한 정치 의제에서 멀어져갔다.

광주청문회는 교착상태에 빠졌고, 여야는 밀실회담으로 정치적 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결국 노태우와 김영삼, 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이 출범함으로써 12월 31일 구체적 조치나 해결을 수반하지 않은 채 전두환의 증언을 끝으로 청문회 정국은 문을 닫았다.

광주청문회의 주요 쟁점

01. 5·18민주화운동의 발생배경 : 과잉진압과 과격시위의 의견대립
02. 집단발포 명령권자와 책임 소재
03. 미국의 책임 여부
04. 5·18민주화운동의 성격규정

  • 페이스북공유
  • 트위터공유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인쇄
Top이동
61965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로 152 5·18기념문화센터 1층 5·18기념재단(쌍촌동 1268번지) 전화번호 062-360-0518 팩스번호 062-360-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