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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을 위한 행진곡
왜곡

진실

님을 위한 행진곡! 이 노래는 80년대 이래 한국 민주화운동의 애국가였다. 대학가는 물론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각종 투쟁현장에서 단골 메뉴로 불리었다. 5·18 민주화운동이 정부 기념일로 지정된 1997년부터는 정부 주관의 5·18기념식에서 계속 제창돼왔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 두 번째 해인 2009년 기념식부터는 기존의 ‘제창’이 아닌 ‘합창’으로 바뀌었다. 합창단이 이 곡을 부르면 원하는 참석자들만 따라 부르는 방식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취임기간 중 첫 해인 2013년에 한 차례 5·18기념식에 참석했는데, ‘님을 위한 행진곡’합창 때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보수논객들이 색깔을 칠했다. “이 노래에서 ‘님’은 김일성을 지칭한다. ‘새날’은 공산주의 혁명이 완성되는 날이다. 황석영은 김일성의 지시로 이 노래를 만들었다....” 황석영은 1989년 방북하였고 이 노래는 1982년에 만들어 졌다. 김일성의 지시를 받고 만들었다면 황석영은 간첩인 셈이다.
왜 수구기득권층은 이 노래를 싫어할까? 5·18은 그들에게는 불편한 진실이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국가폭력의 민낯을 이 노래는 정확히 지적한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또한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고 남은 자들에게 권유한다. 불의와 폭력에 맞서기를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작곡자 김종률은 말한다. “민주주의엔 보수와 진보가 따로 있지 않잖습니까? 일부의 노래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노래, 국민의 노래가 되면 좋겠습니다.”
2017년 제37주년 5·18 기념식에서 ‘님을 위한 행진곡’은 9년 만에 제창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를 통해 “ ‘님을 위한 행진곡’은 5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그 자체다.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님’은 윤상원 열사만이 아니라 5월영령, 더 나아가 민주화를 열망하며 독재에 항거하다 산화해 간 모든 넋을 가리킨다.「님의 침묵」의 시인 한용운 선생의 말처럼 “님은 님만이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영혼결혼식
1982년 2월 20일, 광주 망월동 5·18 구묘역에 한 쌍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결혼식장에는 신방에 쓸 이불이며 옷가지는 물론이고 축의금을 받는 사람까지 앉아 있어 살아있는 사람의 결혼식과 다르지 않았다. 그 결혼식은 광산 임곡이 고향인 신랑 윤상원과 보성 노동이 고향인 신부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었다.

신랑 윤상원은 광산 임곡 출신의 사회운동가이자 5·18 당시 항쟁지도부로 투철한 활동을 벌이다가 1980년 5월 27일 새벽, 도청에서 계엄군의 총에 산화하신 분으로 당시 나이 31세였다. 신부 박기순은 대학생 신분을 속이고 공장에 취업하기도 했던 노동운동가로 1978년 광천동에 들어선 [들불야학] 창설을 주도하였으나 그 해 겨울 예기치 않은 사고로 운명하였으며 당시 나이 22세였다.
두 분은 모두 대학 학생운동 선후배 사이로 들불야학에 교사로 참여하였으며 동료와 지인들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신실한 운동가였다. 그날 결혼식은 박기순과 윤상원, 두 분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던 많은 분들이 두 영혼을 맺어주자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여 이루어진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행사였다.
하객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신랑 측에서 초빙한 임곡 출신 무녀가 굿을 한바탕 벌여서 두 분의 영혼을 불러냈다. 주례인 문병란 시인이 준비한 시를 낭송하여 두 분의 영혼이 그날부터 부부의 인연으로 맺어졌음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그 시가 바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라는 유명한 시구가 나오는 [부활의 노래]이다. 결혼식이 끝나자 옷가지 이불 등을 태워 하늘나라로 보낸 후 하객들은 음식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두 분의 결혼을 축하하였다.
결혼식을 올린 지 15년이 지난 1997년, 망월동 5·18국립묘지가 조성되면서 일반 묘역에 계셨던 박기순 열사와 민주열사 묘역에 계셨던 윤상원 열사는 합장으로 5월 묘역에 함께 모셔졌다.

 

 

노래극「넋풀이」
박기순 열사와 윤상원 열사의 영혼결혼식이 치러졌던 1982년 광주는 슬픔과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당시는 수백 명의 5월항쟁 관련자들이 감옥에 갇혀 있었으며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수배된 상태로 시국에 관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1982년 3월 어느 날 광주 운암동 소재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 황석영, 김종률, 전용호가 모였다. 5월항쟁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영혼결혼식에도 참여하지 못하여 죄책감을 가지고 있던 황석영이 윤상원, 박기순 두 분의 영혼을 기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의지를 결집하자는 의미로 창작노래극 제작을 제안했으며 둘은 기꺼이 찬성하였다.
대학가요제 수상 경력을 가진 전남대학교 3학년 김종률은 마침 군에 입대하려고 휴학 중이었는데, 대학 시절 ‘사랑의 학교’라는 야간학교에서 교사활동을 하며 노동자들의 고통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황석영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전용호 또한 5월항쟁 당시 투사회보 제작 사건으로 투옥된 후 출소하여 흩어진 광주의 문화운동 조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황석영과 상의하고 있던 중이었다.

창작노래극은 전체 구상과 노랫말은 황석영이 책임지고 김종률은 작곡을 담당하고 전용호는 노래 부를 사람을 물색하고 연락하는 일을 맡았다. 황석영은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 김준태 시인 등의 시집에서 시를 골라 노랫말 형태로 만들었다. 김종률은 1박2일 동안에 노래를 만들었다. 총 7곡 중 6곡은 이미 작곡한 곡에 가사를 조금씩 수정하였고,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행진곡이 필요해서 새롭게 만든 게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김종률은 열망에 가득 차서 4시간 만에 곡을 썼다. 이렇게 작곡이 끝나고, 거기에 황석영이 백기완 선생의 장편시 ‘묏비나리’ 중 한 부분을 활용해 노랫말을 썼다. 이 노래들과 무녀의 초혼굿 사설, 문병란 시인의 [부활의 노래] 등으로 줄거리를 만들어「넋풀이」라는 노래극 대본을 만들었다.
그 해 4월 어느 날 저녁, 황석영의 집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김종률, 전용호, 광주문화방송국에 막 입사한 오정묵과 부인 임영희, 극회 광대 출신으로 음악교사인 임희숙, 탈춤반 출신 윤만식, 기독청년운동가 김은경, 영문도 모르고 참석한 전남대 음악과 여학생, 녹음기를 빌려온 민청학련 출신 이훈우, 5월항쟁으로 구속되었다가 군대에 끌려간 후 휴가 나온 김선출 등이었다.
그들은 각자 분담한 대로 개인 연습을 한 뒤 새벽 2시경 함께 모여 녹음작업을 하였다. 기타와 꽹과리 소리가 외부로 퍼져나가지 않도록 담요로 거실 유리창을 모두 막았다. 이렇게 노래극 [넋풀이] 테이프 작업은 완성되었다.
[넋풀이] 테이프는 1982년 후반기에 기독청년협의회(EYC) 명의로 2000개가 제작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다. [넋풀이]에 수록된 7편의 창작곡 중에 씩씩한 행진곡풍의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 과 민요풍의 노래 ‘에루아 에루얼싸’가 인기가 있어 널리 전파되었다. 그 중 ‘님을 위한 행진곡’ 은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학생 · 시민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좋은 노래는 혼자 부르지 않는다. 그래서 노래는 힘이다.

 

들불야학을 아시나요
5·18 민중항쟁 당시 많은 활동가를 배출한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탄생했다. 들불야학이 자리 잡은 광주시 광천동은 광주공단이 위치해 있었고 주민 대부분이 한국전쟁의 피난민과 전남의 이농민으로 이루어진 빈민가였다. 암울한 유신정권 말기 긴급조치로 숨죽여 지내던 시절, 운동권학생들은 새로운 모색을 한다. 1978년 6월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뒤, 공장에 위장 취업해 있던 박기순(당시 전남대 3년)이, 광주 출신으로 서울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 최기혁, 전복길, 김영철 그리고 전남대생 나상진, 임낙평, 신영일, 이경옥 등과 함께 들불야학을 창립하였다.
빈민주거단지 광천시민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주민운동을 실천하고 있던 YWCA 신협직원 김영철, 박용준의 가세로 들불야학은 점점 자리를 잡아갔다.
들불야학은 중학과정을 가르치긴 하였으나 검정고시 야학이 아니라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노동운동가 배출을 목표로 한 노동야학을 추구하였다. 이들은 교사를 강학(講學)이라 지칭하였다. 이는 교사와 학생간의 평등한 관계만이 아니라 가르치며 배워 서로 성장한다는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새로운 교육철학이 담긴 말이다. 이후 박기순의 권유로 대학졸업 후 6개월간의 은행
원 생활을 청산하고 노동운동을 모색하고 있던 윤상원이 강학으로 동참하고 윤상원의 권유로 훗날 전남대총학생회장이 된 박관현이 참여하는 등 들불야학은 질적 · 양적 성장을 한다. 78년 12월 26일 연탄가스로 숨진 박기순의 안타까운 비극도 있었지만, 2기(79년)에는 무려 50명의 학생이 들어오고 체육대회, 연극공연, 문집 발간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그들 앞에는 운명적인 시간 5·18이 기다리고 있었다. 5·18당시 들불의 강학과 학생들은 항쟁에 전면적으로 참여하여 투사회보를 제작하고 항쟁지도부에서 적극적 활동을 펼쳤다. 5월 27일 새벽 윤상원은 도청에서, 박용준은 YWCA에서 산화하였고 체포된 김영철은 고문후유증으로 98년 숨졌다. 수배됐던 박관현은 82년 옥중 사망하였으며, 신영일과 박효선도 이후 민주화운동을 펼치다 과로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들불야학은 1981년 4기 졸업을 끝으로 문을 닫았다. 고난의 시대에 새로운 세상을 여는 ‘들불’ 이 되고자 했던 그들. 그들은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각자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무를 다한 분들이다.
들불야학은 80년대 한반도 민주화운동의 슬프면서 위대한 자화상이다.

 

  

문재인 대통령 ‘5·18 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사’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늘 5·18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아, 5·18묘역에 서니 감회가 매우 깊습니다. 37년 전 그날의 광주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슬프고 아픈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먼저 80년 오월의 광주시민들을 떠올립니다. 누군가의 가족이었고 이웃이었습니다. 평범한 시민이었고 학생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권과 자유를 억압받지 않는, 평범한 일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광주 영령들 앞에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월 광주가 남긴 아픔과 상처를 간직한 채 오늘을 살
고 계시는 유가족과 부상자 여러분께도 깊은 위로의 말씀을 전합니다.
1980년 오월 광주는 지금도 살아있는 현실입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역사입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이 비극의 역사를 딛고 섰습니다. 광주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의 민주주의는 버티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저는 오월 광주의 정신으로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광주시민과 전남도민 여러분께 각별한 존경의 말씀을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5·18은 불의한 국가권력이 국민의 생명과 인권을 유린한 우리 현대사의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에 맞선 시민들의 항쟁이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웠습니다. 진실은 오랜 시간 은폐되고, 왜곡되고, 탄압 받았습니다. 그러나 서슬퍼런 독재의 어둠 속에서도 국민들은 광주의 불빛을 따라 한걸음씩 나아갔습니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일이 민주화운동이 되었습니다.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저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저 자신도 5·18때 구속된 일이 있었지만 제가 겪은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광주의 진실은 저에게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고, 아픔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크나큰 부채감이었습니다. 그 부채감이 민주화운동에 나설 용기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저를 오늘 이 자리에 서기까지 성장시켜준 힘이 됐습니다.
마침내 오월 광주는 지난 겨울 전국을 밝힌 위대한 촛불혁명으로 부활했습니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분노와 정의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의 주인은 국민임을 확인하는 함성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자는 치열한 열정과 하나 된 마음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감히 말씀드립니다. 새롭게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습니다. 1987년 6월항쟁과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의 맥을 잇고 있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다짐합니다.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과 촛불혁명의 정신을 받들어 이 땅의 민주주의를 온전히 복원할 것입니다. 광주 영령들이 마음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성숙한 민주주의 꽃을 피워낼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오월 광주를 왜곡하고 폄훼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룩된 이 땅의 민주주의의 역사에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새 정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더욱 큰 노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헬기사격까지 포함하여 발포의 진상과 책임을 반드시 밝혀내겠습니다. 5·18 관련 자료의 폐기와 역사왜곡을 막겠습니다. 전남도청 복원 문제는 광주시와 협의하고 협력하겠습니다. 완전한 진상규명은 결코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닙니다. 상식과 정의의 문제입니다. 우리 국민 모두가 함께 가꾸어야할 민주주의의 가치를 보존하는 일입니다.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담겠다는 저의 공약도 지키겠습니다. 광주정신을 헌법으로 계승하는 진정한 민주공화국 시대를 열겠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비로소 온 국민이 기억하고 배우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 될 것입니다. 5·18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완료할 수 있도록 이 자리를 빌어서 국회의 협력과 국민여러분의 동의를 정중히 요청 드립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임을 위한 행진곡’ 은 단순한 노래가 아닙니다. 오월의 피와 혼이 응축된 상징입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그 자체입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을 부르는 것은 희생자의 명예를 지키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기억하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은 그동안 상처받은 광주정신을 다시 살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의 제창으로 불필요한 논란이 끝나기를 희망합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2년 전, 진도 팽목항에 5·18의 엄마가 4·16의 엄마에게 보낸 펼침막이 있었습니다.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짓밟은 국가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한 국가를 통렬히 꾸짖는 외침이었습니다. 다시는 그런 원통함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사람의 존엄함을 하늘처럼 존중하겠습니다. 저는 그것이 국가의 존재가치라고 믿습니다.
저는 오늘, 오월의 죽음과 광주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며 세상에 알리려했던 많은 이들의 희생과 헌신도 함께 기리고 싶습니다.
1982년 광주교도소에서 광주진상규명을 위해 40일 간의 단식으로 옥사한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7년 ‘광주사태 책임자 처벌’ 을 외치며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1988년 ‘광주학살 진상규명’ 을 외치며 명동성당 교육관 4층에서 투신 사망한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1988년 광주는 살아있다’ 외치며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 사망한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 진실을 밝히려던 많은 언론인과 지식인들도 강제해직되고 투옥 당했습니다.
저는 오월의 영령들과 함께 이들의 희생과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고 더 이상 서러운 죽음과 고난이 없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참이 거짓을 이기는 대한민국으로 나아가겠습니다.
광주시민들께도 부탁드립니다. 광주정신으로 희생하며 평생을 살아온 전국의 5·18들을 함께 기억해주십시오. 이제 차별과 배제, 총칼의 상흔이 남긴 아픔을 딛고 광주가 먼저 정의로운 국민통합에 앞장서 주십시오. 광주의 아픔이 아픔으로 머무르지 않고 국민 모두의 상처와 갈등을 품어 안을 때, 광주가 내민 손은 가장 질기고 강한 희망이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오월 광주의 시민들이 나눈 ‘주먹밥과 헌혈’ 이야말로 우리의 자존의 역사입니다. 민주주의의 참 모습입니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그대로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대한민국이 새로운 대한민국입니다. 상식과 정의 앞에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숭고한 5·18정신은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가치로 완성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삼가 5·18영령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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