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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교도소 습격설
왜곡

옛 광주교도소

 

5·18 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
- 2017 전두환 회고록 1권 518쪽


다. 교도소 작전
5.21
19:20분경 노획한 장비로서 15대대의 5명이 고속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차단지점에 도착하자 폭도가 고지 위에서 기관총을 난사, 주위에서 구경하던 민간인 2명이 사살 당하고 2명 부상


5.22
00:40-00:50 사이에 차량에 탑승한 폭도가 고속도로를 이용, 주둔 지역에 대해 사격을 가하면서 접근.
09:20분경에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했으나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을 못하자 이에 11대대에서 즉 각 응사 2명 사살, 4명은 부상을 입고 도주.
10:20 11대대 지역에서 소방차에 탑승하여 공격해오는 폭도 4명에 대해 공격.
19:00-19:40 헬기 공수작전이 끝나고, 전방 추진 진지에서 철수 중
트럭에 분승한 폭도의 사격을 받고 즉각 응사 1명 사살하고 트럭 1대 CAR 1정, LMG실탄 등 노획
23;00시 경 폭도는 광주시내 쪽에서 주간에 아군이 점령하였던 추진 진지에 약 2시간에 걸쳐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 개시.
- 1980. 제3특전여단 [광주소요사태 진압상보]

 

제3공수여단은 5월21일 오후 5시30분께 광주교도소에 도착, 5월24일 오후 2시 15분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할 때까지 대략 사흘 정도 교도소에 주둔했다. 3공수는 21일 도청 집단발포로 시위양상이 무장투쟁으로 전개되자, 신군부 지휘부의 명령에 의해 초기 주둔지였던 전남대를 떠나 외곽인 광주교도소로 이동하게 된다.
제3공수는 광주사태 전투상보를 통해 6차례 정도 교도소 주변에서 사격이 있었으며, [6.주요작전 및 교훈]에서는 광주교도소 [접근]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다만, 전투상보 증 [5.작전경과 및 결과]에서는 [광주교도소 폭도 기습, 피아 교전]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습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전두환 씨와 일부 극우인사들이 주장하는 교도소 습격설은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기본 자료로 삼고 있다.
 

진실

1980년 5월21일 19시 30분 계엄사령부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를 내렸다. 금남로와 조선대에 있던 7, 11공수여단도 광주의 서남쪽으로 이동, 광주의 모든 출입도로를 차단하는 외곽 봉쇄작전을 수행했다.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의 북쪽 관문에 해당한다. 3공수는 21일 오후부터 차단작전에 돌입했으며, 시위대는 역으로 북쪽 관문을 통해 순천, 담양, 전북지역으로의 시위 확산을 기도했다. 이 과정에서 3공수부대와 시 외곽 진출 시민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

 

 

80년 5월 22일 밤 갑자기 교도소 인근에서 총소리가 들려 다음날 아침 확인해보고 공수대원과 시민군 간에 교전이 있었던 것을 알았으며 공수대원의 총에 맞아 숨진 희생자의 시신과 부상자 모두 담양으로 가는 도로에 널려 있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느냐.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 1995.12.14.일자 연합뉴스. 한도희 당시 광주교도소장 인터뷰

 

한 씨의 주장은 ‘폭도와 간첩들의 배후 조종을 받은 불순 세력들이 2700여 명의 복역수를 석방시키려는 의도에서 습격한 것’이라는 신군부의 주장과 발표가 거짓임을 보여준다. 한 씨의 주장을 입증하듯 제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보면 교도소 습격을 한 무장인원이 10여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당시 제3공수여단 병력은 장교 255명, 병사 1137명 등 모두 1392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또 차량으로 20분 이내 거리에 31사단 사령부가 있으며, 광주교도소 자체 방호인력도 존재했다. 상식적으로 무장한 병력이 교도소를 ‘해방’시키려 했다면 최소한 1000명 이상의 시민군을 동원해야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군 문서에서도 보듯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무장폭도가 고작 10명도 안 된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순천행 고속도 사이에 위치, 당시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 병사들로부터 무차별 난사를 받은 몇 가지 피해 사례가 확인됐다.
- 1995.12.28 [12·12 및 5·18사건 특별수사본부] 김상희 주임검사


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고,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3공수여단이 철수해 봉쇄작전을 수행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도 민간인 살상이 발생했다. 당시 3공수여단이 경계했던 광주교도소 부근은 광주-담양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94쪽


1995년 검찰은 광주교도소 현장조사를 통해 5·18 당시 교도소 주변의 교전은 주변 도시와의 차단 임무를 맡고 있던 3공수여단이 광주 상황을 알리기 위해 시 외곽으로 빠져나가려는 시민군을 향해 무차별 발포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검찰의 주장은 이후 진행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도 동일하게 적시된다.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무장시위대가 광주 교도소를 처음 습격한 것은 5월21일 12시경이었다. 당시 교도소는 31사단 병력이 경비하고 있었는데, 무장시위대는 총을 난사하며 공격해왔다. 그러자 전교사는 교도소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3공수여단을 긴급증파했었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 내용은 21일 시민군이 도청 앞 발포 전에 이미 무장을 하고 있었으며, 도청 시위상황과 무관하게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군의 등장과 무장은 21일 오후1시 도청 앞 집단발포 한참 이후이며, 교도소 주변의 첫 교전 상황도 사실상 21일 오후 늦은 시간이었음을 3공수여단 전투상보가 말하고 있다.
신군부의 교도소 습격 주장은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인원이 10명 미만의 소규모 △교전 장소가 입구가 아닌 교도소와 동떨어진 바리케이트나 도로 △검찰과 국방부 조사 결과 교도소 주변 교전 사망자가 중무장한 시위대가 아닌 민간인이었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다. 교도소 습격설은 교도소 주변 도로를 지나가던 양민에 대한 군의 무차별적인 발포가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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