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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 광주 침투설
왜곡


복면 쓴 5·18 시민군 사진의 주인공 임성택씨가 광주 남구 자택에서 광주일보를 보며 당시 상황을 전하고 있다. (광주일보 2015년 5월 15일자 3면)

 

광주사태는 소수의 좌익과 북한에서 파견한 특수부대원들이 순수한 군중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 지만원 2002년 8.16. 신문광고

 

5·18은 순전히 600여명의 북한 특수군이 일으킨 모략작전이었고, 광주인들은 민주화운동을 위해서든 폭동을 위해서든 독자적인 시위대를 구성한바 전혀 없다.
북한군 600명은 5월21일 오후부터 22일 새벽까지 마지막 발악을 하듯이 광주교도소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때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공수부대와 고지쟁탈전을 벌여 아마도 많은 북한특수군이 사살됐을 겁니다. 북한특수군은 중상을 당했을 경우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죽기 전에 소형의 폭발물로 자기 몸을 분쇄하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고 합니다.
-지만원 2014 5·18분석 최종 보고서 

진실



5.18 당시 시민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적 조사는 모두 6차례나 있었다. 항쟁 직후 계엄사 발표, 1985년 국방부 재조사, 1988년 국회청문회, 1995년 검찰 및 국방부조사, 1996년~1997년 재판, 2007년 국방부과거사위원회 조사 등 이다.
이 여섯 번의 조사에서 북한군이 대대 규모로 침투했다는 증거나 정황은 한 번도 발표된 바 없었다.


신군부는 5·18기간 동안 ‘북 공작원 독침사건’을 조작하는 등 시민군을 북한과 연계시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상황이었음. 그러나 신군부는 그 어떤 북한군의 침투는 물론 북한과의 연계의혹을 밝혀내지 못하였음.
-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5·18에 북한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반하는 표현은 역사 왜곡이고, 역사 왜곡은 반사회적 행위로, 이에 가담한 일베 회원들의 글은 삭제 등의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북한특수군 개입을 증언시킨 방송들은 방통위를 통해 제재할 것이며 역사 왜곡자들은 검찰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 정홍원 국무총리 (2013.6.10.)


대대규모 북한군의 광주개입설 같은 황당무계한 억지, 최소한의 인식능력만 있어도 허구성을 곧바로 알 수 있는 주장에 넘어가는 것은 자기폭로가 된다. 600명의 군인들이 흔적도 없이 나타나, 유혈사태를 저지른 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는 것은 투명인간이 아니면 불가능하고, SF영화로도 만들 수 없는 일 아닌가?
- 조갑제의 광주사태 (2013. 6)

 

국가안전기획부가 작성한 ‘광주사태 상황일지 및 피해현황(1985)’ 에는 시민군의 세세한 활동까지 시간대별로 기재될 정도로 상세한 기록임에도 북한군 내용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결국 5·18직후 어떤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북한군 개입설’ 의 의도적 거론은 5·18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훼손하려는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

 

 

신군부의 북한군 개입설 유포

전두환 신군부는 5·17비상계엄확대 이전부터 끊임없이 북한의 남침설을 유포했다. 한국의 학생소요사태를 부추기고 혼란의 틈을 타 남침을 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한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 심리를 이용하여 국민들과 시위대간 심정적인 분리를 유도하고, 또 신군부세력의 집권을 위한 빌미로 ‘북한’ 을 끌어들인 것이다.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일본내각조사실 첩보를 북한 남침설 임박의 주요 근거로 사용했다. 일본 첩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한국 정부가 1980년 4월 중순경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했음. 김재규 처형 시 격렬한 항의데모가 발생해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해 남침 시기를 4월중순경으로 예정하였음.
그러나 김재규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이를 연기해 오던 중 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 소요사태가 격화되자 북한은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1980년 5월15일부터 5월 20일 사이에 남침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전 씨가 남침 임박설의 근거로 내세운 일본 첩보는 군에 의해 이미 신빙성을 잃었다. 육군정보참모부분석(1980.5.10.)에 따르면 북한군사동향은 정상적인 활동수준으로서 특이 전쟁징후는 없다고 판단했다.

“입수첩보(5월 남침설 및 전방병력 배치완료설)는 신빙도가 희박하며, 이는 우리의 국내 정세 추이에 따른 북괴 남침방책의 일반적 가능성을 추측한 것으로 평가됨.” 이라는 것이다. 육군본부에서 북한의 남침준비완료라는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고 판단했음에도 신군부 세력은 ‘북괴남침설’, 그리고 이와 연계된 소요를 근거로 ‘국가위기’ 상황을 조장하며 지역계엄을 전국 계엄으로 확대시켰다. 북한 동향을 전문적으로 분석하는 육군본부 정보참모부에서 신빙성 없는 것으로 판단한 대북 첩보를 신군부는 자신들의 권력획득을 위해 활용한 것이다.

 


무기고를 북한군이 털었다고?

광주 시민들의 무장은 5월20일 야간 광주역과 21일 집단 발포에 충격을 받은 일부 시위대가 자위 차원에서 무장의 필요성을 절감해 진행됐다. 시위대는 전남지역의 지서와 파출소의 무기고에서 총기를 꺼내 무장하기 시작했고, 일부는 방위사업체인 아세아자동차의 군용 트럭을 가지고 나와 시위대에 합류했다.
그런데 일부 극우인사들은 무기고 탈취가 북한군 소행이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인 인사가 지만원 씨이다. 그는 “북한 특수부대 600명은 전남 17개 시·군에 위장돼 있는 44개 무기고를 낮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 털어 5,308정의 무기와 탄약, 8톤의 TNT를 탈취하였습니다. 광주에 이런 조직력과 능력을 갖춘 대학생시위대는 없었습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만원의 주장대로 북한군 600명이 44개소를 동시에 습격하려면 무기고 한 곳당 적어도 10~15명의 북한 특수군이 참여해야 한다. 헌데 무기고 공격에 참여했던 시위대원들은 적게는 수십 명에서 수백 명, 수천 명의 시위대들이 합세해 면단위 지서를 찾아가 무기를 빼냈다고 한다.


시위대에 의한 무기 탈취는 5월19일 15시 15분경 기독교 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 병력으로부터 M16 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되었다.
5월21일 13시경 광산 하남 파출소에서 카빈 9정이 탈취되었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 탈취에 나선 것은 5월21일 13시경 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인근지역으로 진출하여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 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으로 총기와 실탄을 탈취하였다.
-1995 검찰 수사결과 보고서

 



광주 항쟁 당시 무기고 탈취는 21일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이후 광주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공수부대의 만행에 저항하기 위한 자위권 행위였다.
주로 면단위 작은 경찰서 무기고나 화순 탄광의 발파용 다이너마이트, 아시아자동차의 군용 차량을 가지고 시위에 참여했다.
국가 기관의 자료 어디에도 북한 특수군이 무기고 공격에 가담하고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다. 5·18과 북한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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