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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공수부대 강경진압
왜곡

5월 18일 진압봉으로 시민을 가격하는 공수부대

 

 정웅 사단장의 작전 지침은 위력시위를 생략한 채 시위대의 모든 퇴로를 차단 봉쇄하고 체포 위주로 시위를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도망가는 시위대를 끝까지 추격하게 되면 퇴로가 막힌 시위대는 체포하려는 군인과 충돌을 빚게 된다.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시위대를 잡으려다보면 군인들의 행동도 거칠어 질 수밖에 없다.
-2017. 전두환 회고록 1권 498쪽


오늘의 엄청난 사태로 확산된 것은 상당수의 타 지역 불순인물 및 고첩들이 사태를 극한적인 상태로 유도하기 위하여 여러분의 고장에 잠입, 터무니없는 악성 유언비어의 유포와 공공시설 파괴 방화, 장비 및 재산 약탈행위 등을 통하여 계획적으로 지역감정을 자극, 선동하고 난동행위를 선도한 데 기인된 것이다.
-1980.5.21 계엄사령관 이희성 담화문

 



신군부는 광주 시위가 비극적 사태로 확산된 근본원인으로 불순인물과 고정간첩의 침투, 이들의 의도적인 유언비어 유포 등으로 보고 있다. 전두환 씨는 보다 구체적으로 현장 지휘관의 미숙한 작전 지침이 화를 불렀다며, 그 책임을 광주 향토사단인 31사단의 정웅 사단장에게 돌리고 있다. 


 

진실

공수부대 시내 출동, 융통성 있게 운영. 전 가용 작전부대 투입.

주모자 체포. 단호한 조치. 포고령 위반자는 가용수단 동원 엄중 처리.
소요자는 최후의 1인까지 추격하여 타격 및 체포
 - 1980. 5. 18 23:00 2군 사령관 강조사항


도시게릴라식 소요 및 난동 형태에 대비. 소규모로 편성한 다수 진압부대를 융통성 있게 운용. 전 작전 가용 병력 최대 운용. 바둑판식 분할 점령. 대대단위 기동타격대 보유 조기에 분할 타격 체포. 군중 10인 이상 집결 방지. 다수 편의대 운용(첩보 수집). 치명상을 입지 않은 범위 내에서 과감한 타격. 통금시간 대폭 연장. 총기피탈 방지(엄중 문책). 주민에게 선무 홍보활동 강화(전단, 방송)
 - 1980. 5. 19. 2군사령부 충정작전 지침(작상전 426호)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은 모두 3개 여단으로 순차적으로 증파됐는데,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에 따라 가장 먼저 7공수여단이 광주에 투입됐다. 7공수여단은 18일 새벽 전남대, 광주교대에 들어가 학생들을 검문하고, 이날 오전 전남대 정문에서 전남대 학생들과 충돌했다. 이어 금남로로 진출해 광주시위의 초기 진압에 나섰다.
19일에는 7공수여단이 증파되는데 이들 또한 광주 투입과 동시에 금남로 시위 진압에 나서며, 20일에는 3공수여단이 출동해 광주역 일대에서 진압 작전을 벌였다.
광주 비극의 단초를 제공한 공수여단은 18, 19일 진압작전을 펼쳤던 7공수여단으로, 초기부터 시민의 원성을 살 정도로 강경한 구타 진압 작전을 전개했다. 당시 군 최고지휘부의 작전 지침은 시종일관 강경진압과 과감한 타격 위주의 체포였다.

 

우리 위원회와의 면담에서 광주 시내에서의 시위 진압에 투입된 한 공수부대원은 시위진압이 해산 위주가 아닌 체포 위주였기 때문에 과격진압이 발생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광주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은 체포 위주로 진압했기에 단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체포했다. 7공수여단 33대대는 6:30에 진압작전을 종결해 103명을 체포했고, 35대대는 19:00에 진압작전을 종결해 173명을 체포했다. 또 5. 19. 01:50에도 광주시내 골목을 다니며 가택을 수색하며 시위진압을 하기도 했다.
-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65쪽


계엄부사령관 지시사항. 80. 5. 18. 계엄부사령관은 전남대학교 소요에 단호한 계엄사의 조치를 보여주기 위하여 보안사 계통에서 전교사령관에게 지휘 조언, 강력하게 다루도록 조치해 줄 것을 요망하고 있음.
- 보안사, 『광주사태 일일속보철』(1980. 5. 19), 『383-1980-89』, 11쪽

 

 

영화 ‘택시운전사’ 의 실제 모델인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5 월 19일 현장

 

광주에 투입된 공수여단의 체포 위주 강경진압은 현장 지휘관인 31사단장과 윤흥정 전교사령관의 작전 지시 때문이 아니라 계엄사령부와 직속 상관인 2군사령부의 지시 때문이었다. 전두환 씨는 31사단장의 체포 지시 때문에 과잉 과격 진압이 불가피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당시 계엄사령부와 2군사령부 등 상부의 지시는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을 부채질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광주에서 시위가 계속되자 계엄부사령관인 육군 참모차장 황영시는 강력하게 진압하도록 지시했다.
5월18일 금남로에서 희생당한 김경철 씨의 사례는 공수부대의 진압이 체포를 넘어 살인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살인 진압은 현장 지휘관이 아닌 신군부-계엄사-2군사령관-전교사, 31사단장-공수여단장으로 내려온 작전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김경철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새벽 3시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 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이었다.
80년 당시 신군부와 광주 현장의 공수부대 지휘관들은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정권 찬탈의 걸림돌로 인식, 마치 적을 대하듯 곤봉과 대검,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진압했다. 계엄군의 야만적인 진압 방식은 거대한 분노의 불길을 불러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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