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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5·18의 기억과 역사11: 독일편>을 펴내며 / 정진헌(국립통일교육원 교수)
글쓴이 : 5·18기념재단    작성일 : 2022-01-26     조회 : 278

  

 

독일에서 5·18은 미래가 되었다

-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5·18의 기억과 역사11: 독일편>을 펴내며

 

정진헌(국립통일교육원 교수. 문화인류학 박사)

 

 

독일에서 5·18항쟁은 어떤 의미를 지닌 걸까? 뜬금없는 질문일지 모른다. 독일은 한국의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이다. 비행기로 중국과 북극 지역을 지나야 만나는 유럽, 거기서도 내륙에 위치한 곳이다. 날씨도 다르고 음식도 다르다. 구운 빵에 얇게 썬 잘라미나 절인 돼지고기, 치즈 등을 얹어 먹는 간편한 식사가 집밥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독일은 낯설지 않다. 

 

유명한 자동차 브랜드 때문만은 아니다. 세계적인 음악과 문학, 철학과 신학 등 인류 문명의 자산에서부터 다양한 부엌살림도구와 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메이드인저머니 제품들 때문일까? 분데스리가 축구나 헤페바이젠 독일 밀맥주의 맛 때문일까? 그 모두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실은 한국의 근대사와 밀접하게 연결된 측면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을 통해 연결된 인연이 깊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라는 타이틀로 독일로 보내졌던 청년 가장들. 그들은 가난한 가족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낯선 땅 지하 막장과 병원 중환자실의 노동자가 되었다. 

 

 

- 1980년 5월 베를린 쿠담에서 열린 가두시위
 

 

이분들 중 다수는 한국으로 돌아오거나 다른 나라로 옮겨갔다. 남은 몇은 현지에 정착하여 재독 한인공동체의 기반을 다졌다. 그들은 노동자의 삶을 이어갔거나, 대학 공부를 다시하여 전문인이 되기도 했다. 당시 유학 와있던 또래 지식인들과 같은 교회를 다니면서 밥도 해주고 함께 독서모임도 하면서 노동자-학생 연대 공동체를 구성했다. 

 

그렇게 이삼십 대 청춘이 삼사십대가 되던 1980년 5월 하순 어느 날이었다. 1970년대 서슬 퍼런 유신 정권에게 안녕을 고하고, 마침내 민주주의의 봄이 오리라 기대하던 어느 날이었다. 독일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에서 끔찍한 학살의 장면들이 펼쳐졌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인 줄 알았다. 하지만 방송 멘트에는 분명 한국(Sudkorea)의 광주라고 소개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잘 알려졌듯이, 아시아 지역 특파원이었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가 보내온 영상물이 독일 전역에 퍼진 것이다. 베를린에서는 유학생, 교민, 그리고 그들의 독일인 친구와 가족들이 쿠담지역에서 거리 시위를 열고, 자유대학교 교정에서는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프랑크푸르트(Frankfurt)지역에서도 광주 희생자들에게 보내고자 피를 모았다. 그 당시 서독의 수도였던 본(Bonn)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독일 도처에서 한인들과 그들의 친구들이 독재 타도를 외쳤다. 그전까지 고국의 정부를 비판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도 거리로 나오기도 했다.

 

1980년 5월. 그 당시 독일에 있던 교포와 그들의 독일 친구들은 광주 시민들과 이어져 있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머나먼 타국이었지만, 마음과 가슴으로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5·18은 그들 삶의 일부가 되었다. 타인과 타지의 역사로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로도 독일을 중심으로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5월이면 재유럽오월민중제를 열었다. 그전까지 서로 다른 운동의 지향점을 가진 다양한 단체들이 이때만큼은 함께 모였다. 5·18 희생자를 추모하고, 학습과 토론으로 현안을 논의하고, 대동제처럼 어울리며 공동체성을 키웠다. 하루만으로 부족하여, 2박 3일, 금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점심까지, 그들은 그렇게 어느덧 40여 년동안 광주출정가를 부르고 있다.

 

지금도 나는 이분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2009년 미국에서 학위를 마치고 독일 괴팅겐이라는 작은 학문의 도시에 와서 일한 지 약 3년차 되던 때였다. 우연히 어느 재독한인 웹사이트에서 재유럽오월민중제 행사 안내를 접하고는 깜짝 놀랐다. 대학시절에나 봤었던 5·18관련 행사가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다하니 호기심이 생겼다. 가족 참가비도 저렴한데 식사도 제공된다니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아들도 데리고 행사 장소인 베를린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 재유럽오월민중제를 주최하는 주역들과 함께

 

 

현장에 도착하여 나는 다시 한번 놀랐다. 행사를 주최하는 분들이 대부분 과거 파독 광부와 간호사 출신이시며 이미 고령의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이었다면 궂은일 안 하시고 의자에나 앉아계실 연배이신데, 이분들은 의자 위에 올라서서 현수막을 붙이고, 제단도 꾸미고, 노래와 식순이 담긴 프린트물도 직접 제작하여 나눠주고, 행사 진행도 직접 하시는 것이었다. 

 

토요일 오전 10시부터 시작되는 본행사 역시 충격이었다. 첫 순서로 광주 영령들을 위한 추모제를 먼저 치루었는데 나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학창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오월가와 님을 위한 행진곡 등을 독일 베를린에 와서 다시 부르게 되다니! 그 순간 나는 가슴이 뛰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속웃음을 참아야 했다. 경이로움의 감동은 오묘한 감정 상태를 만들었다. 여긴 아직 1980년대의 정서와 열정이 살아있구나! 그래서 나는 일요일 마지막 평가 회의 때 어르신 모두 앞에 나가서 큰 절로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당시의 만남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 이후 오월민중제를 함께 준비하는 주최측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그 분들은 각 지역에서 다양한 활동들을 하신다는 걸 차차 알게 되었다. 5·18항쟁이 있기 전부터 독일내에서는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선도적인 실천들이 적지 않았다. 대개는 목회자나 유학생 출신의 지식인층이 주도한 운동들이었다. 반면에 현재까지 40년이 넘도록 5·18정신을 기리며 오월민중제를 꾸준히 이어오고 계신 분들은 광부와 간호사 출신 교민들이 대부분이다. 이 분들 중에는 5·18항쟁 소식을 접한 후 자신과 사회에 대한 관점과 태도를 바꾸신 분들이 적지 않다.  

 

재독 교포 사회는 일찌감치 동백림사건(1967~69)과 유럽간첩단사건(1971) 등을 통해 국가폭력의 공포가 강화되었다. 파독 당시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았기에 반공-반북 정서가 주류적 감정이다. 하지만 유럽 냉전의 최전선이었던 독일은 세계 2차대전의 전범국으로서 점령 분단되었을 뿐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지 않았다. 게다가 1960년대 후반, 소위 68세대운동으로 인해 반전, 생태, 노동, 인권과 평등, 탈권위주의 문화뿐 아니라, 서독 정부의 동방정책으로 이미 탈냉전의 분위기를 만들어갔다. 하여 서독 사람들은 동독 방문이 보다 자유로왔고, 서베를린에서 서독으로의 여행도 육로를 통해 빈번해졌다. 독일의 분단 시기는 이미 한국이 추구하는 낮은 단계의 통일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광주에서 시작된 5·18정신은 독일에 와서는 보다 복합적인 의미로 확장될 수 있었다. 재유럽오월민중제라는 대동제 성격의 행사를 매년 주도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주요 인물들의 생애사를 통해 접근할 때 5·18항쟁은 지리적 혈연적 한계를 넘어선 저항과 연대의 민중사가 된다. 광주와 국내 시민들을 넘어, 해외 소녀가장들을 역사의 주체로 나서게 한 힘이 5·18이고, 고국에 있는 익명의 시민들과 동지가 되고 광주를 또 다른 고향으로 여기게 된 의례가 오월민중제였던 것이다. 

 

 

- 2020년 코로나19 시국에 온-오프라인으로 치룬 40주년 오월민중제

 

 

나아가 오월민중제를 통해 공동체적 공감인 코뮤니타스를 경험한 한인들은, 고국의 민주화와 통일, 노동자와 여성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과제들을 위해 독일 내 관련 단체들과 국제적인 연대력으로 발전시켰다. 독일의 녹색당, 금속노조 등을 국내 단체들과 연계시켰으며, 재독일본여성모임같은 이주민공동체들과의 연대, 그리고 한국 현안들을 보편적인 정의와 시대정신에 맞추어 청년세대들과도 소통하고 협력하려 노력했다.

 

나는 지난 십여년 가까이 재독한인 재야인사들과 함께하며, 이분들의 사회적 송금(social remittances)에 주목해왔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분들이 국가 재건 시기 한국 경제에 미친 경제적 기여는 이미 알려진 바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비물질적 자산들인 새로운 생각, 기술, 에티켓, 가치관 등은 간과된 경향이었다. 이러한 비물질적 자산들은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 고국과 현지에 쌍방향으로 전이되었다. 한국에서 어렵사리 방문한 운동가들을 제 가족과 오랜 동지처럼 보살펴준 그 따뜻한 “정성”에 대해 한국 손님들은 두고 두고 이야기 한다. 독일 현지에서도 한류가 뜨기 전부터 한국 전통풍물을 소개했고, 한국 사회의 노동운동과 여성운동, 역사청산문제와 남북한 평화와 통일운동 등 한국발 민주주의와 평화만들기 성과들을 독일에 알렸다.

 

이러한 한국-독일간 사회적 송금은 미래지향적 “열망”의 씨앗이 되었다. 전범국으로서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끊임없이 반성하며, 분단에서 통일로 이어진 독일을 몸소 경험한 한인들은 탈경계 감수성과 사회적 합의라는 과정 중심의 공존과 상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때문에 나는 이분들의 삶속에서 더욱 풍부해진 5·18정신과 감성을 이야기로 담고 싶었다. 그런 찰나에 작년 5·18항쟁 40주년을 맞이하여 5·18기념재단의 지원으로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5·18의 기억과 역사: 독일편』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줄 모른다. 

 

구술사를 채록하는 작업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독일은 한국만큼 방역시스템을 갖추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마비된 것 같았다. 오월민중제를 주최하는 네 개 단체인 한민족유럽연대, (사)한국민중문화모임, (사)코리아협의회, 그리고 베를린 노동교실로 구성된 『재유럽오월항쟁협의회』(의장 최영숙) 산하에 출판기획위원회를 구성하여 세웠던 애초의 계획을 변경해야 했다. 지역별 소그룹 집담회 중심에서 개인별 심층 인터뷰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나는 여러 도시에 나뉘어 사시는 한분 한분을 일일이 찾아뵈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만큼 한분 한분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수십 년에 걸친 경험담을 담고자 했으니 오히려 시간이 모자랐다. 어느 분은 몇 시간씩 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모아진 이야기들을 줄이고 다듬었으나 되도록 그분들의 생생한 목소리가 들리도록 편집한 것이 바로 이번 <독일편>이다. 세상의 어떤 이론도 한 사람의 일상을 담아낼 수 없듯이, 이번 구술사도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다. 그러나 이 부족함은 그만큼 박제할 수 없는 삶이라는 점, 현재진행형의 대화라는 점으로 여겨지길 바란다. 5·18정신은 그렇게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미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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