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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광주’와 도래할 민주주의 / 홍태영(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과 교수) / 하반기 오월기억포럼 2
글쓴이 : 5·18기념재단    작성일 : 2022-11-10     조회 : 49

 

- 홍태영(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과 교수)

 

 

‘5·18광주’와 도래할 민주주의 / 홍태영(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과 교수)

 

<‘5·18 광주’와 도래할 민주주의>의 주제로 홍태영(국방대학교 안보정책학과) 교수의 강연이 10월 28일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진행됐다. 해당 포럼에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출발이자 미래로서 ‘5·18 광주’를 이해하려는 논의를 시도했다.

 

다양한 연구자의 시선으로 5·18 강연을 진행하는 <오월기억포럼>은 2022년 상반기의 5차례에 이어 하반기 3차례 진행 중이다. 이번 포럼은 하반기 들어 두 번째로 진행된 것이다.

 

 

 

 

2022년 하반기 <오월기억포럼> 2차

<‘5·18광주’와 도래할 민주주의>

 

#518광주 #절대공동체 #집단기억 #도래할민주주의

 

 

1. 끝나지 않는 5·18 광주

 

5·18이후 1980년대는 민주화투쟁, 즉 독재와 민주주의 대립과 투쟁이었고, 87년 민주화 이후는 민주주의 공고화의 역사이다. 이 과정에서 5·18은 시기에 따라 새로운 방식으로 소환되고 그 시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5·18에 대한 재현과 기억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로서 5·18광주에 대한 진실 규명에 집중되는 양상이었고, 이후 서서히 5·18의 역사적 사건 속에 숨겨져 있던 다양한 주체들의 복원, 그 아픔에 대한 위로 그리고 화해와 단결, 보상 등의 문제로 옮겨져 왔다.

 

5·18광주는 법률을 통해 ‘5·18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 명칭을 부여받음으로써 민주화라는 틀 속에서 위치지어지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5·18광주의 현재성을 어떠한 방식으로 재현해 내야 할지 고민할 지점에 놓여있다.

 

5·18을 다룬 연구 중 5·18광주 자체의 주체적 측면에 초점을 둔 연구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최정운(1999)의 절대공동체론이 있다. 최정운은 “진정한 인간임을 공포를 극복한 용기와 이성있는 시민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결합한 절대공동체”를 5·18 광주에서 발견하면서, 5·18이 갖는 그 자체의 의미를 깊이있게 분석하고 드러내고자 하였다. 최정운의 연구 이외에도 ‘자율공동체’라고 명명하는 조대엽(2003), 한상진(1998)의 ‘초계급적 공동체’ 등이 있다. 박영균(2011)과 김정한(2013)의 연구는 한편으로 최정운의 ‘절대공동체’ 개념이 갖는 의의와 한계, 특히 절대공동체 개념이 만들어낸 아름다운 공동체라는 신화 속에 갇힌 ‘반(反)정치’를 넘어서 민주주의적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 및 반폭력과 인권의 정치의 문제설정으로의 활장의 가능성을 제시하면서 5·18연구의 깊이를 더하였다. 

 

 


 

 

2. 절대공동체의 신화화

 

‘왜 광주시민들은 총을 들어야 했는가?’의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은 너무나 뻔한 싸움, 즉 비록 총을 단다한들 질 것이 뻔한 무모한 싸움에 그들이 총을 들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점 때문이다. 

최정운이 말하는, 발포와 함께 형성된 절대공동체는 ‘폭력에 대한 공포와 자신에 대한 수치를 이성과 용기로 극복하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시민들이 만나 서로가 진정한 인간임을, 공포를 극복한 용기와 이성있는 시민임을 인정하고 축하하고 결합한 공동체’였다. 이러한 절대공동체라는 개념화는 분명 당시 상황을 집약적으로 표현하는 의미있는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형성되는 과정에서의 다양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이진경, 조원광(2009)은 당시 광주시민들의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던 동력은 대주으이 투쟁이 확산되면서 전염된 감응으로 ‘분노보다는 신명이나 기쁨의 감응’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공포와 분노의 공동체를 넘어서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갈망을 찾을 수 있을까? 유비해본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현실로부터 발생하였고, 그것은 광주 내지는 호남이 가지고 있었던 복합적 심성, 어쩌면 불과 한 세대 전이었던 1949년 ‘여순사건’과 이후 빨치산 등을 거치면서 가지고 있었던 학살에 대한 두려움과 동시에 ‘빨갱이’이라는 낙인의 두려움 그리고 그것이 만들어냈던 연좌제의 고통, 결국 그것은 해방 이후 호남인들이 가졌던 배제의 한 역사의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좀 더 가까이는 다시 박정희 정권에 의해 시작된 김대중으로 표상되는 유신 이후 탄압과 소외의 역사에 대한 두려움 등이 복합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서울의 봄’이 가져다 준 민주화의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러한 두려움의 극복의 과정 속에서 그들은 무기를 들었다. 무기를 든다는 것 자체가 극도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행위 자체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집단심성’이 형성된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한민국의 일원임을 강조하였다. 부당한 군부의 권력에 대항하지만 결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자 했던 당시 광주시민들의 의도는 또한 광주 내지는 전라도라는 지역적 감정 특히 1970년대 이래 지역주의와의 관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광주가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극도의 불안감과 두려움 속에서 MBC 방송국이 불탔듯이, 그들은 남한에서 고립된 섬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극도의 공포감과 두려움, 외로움은 광주시민들로 하여금 눈 앞의 적을 앞두고 동지애가 형성될 수 있었고, 그것이 이른바 ‘절대공동체’를 만들었던 것이다.

 

결코 광주시민들은 자신들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 대항하는 새로운 권력의 주체, 혁명을 꿈꾸지 않았다. 그들은 언제까지나 대한민국의 일원이기를 바랐고, 자신들이 국가권력의 밖으로 밀려나 ‘호모사케르’가 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 그리고 그것들을 재생시키는 당시 현실 속에서 고립되어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외로움 그리고 결국은 분노가 그들로 하여금 총을 들게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광주시민들은 ‘호모사케르’가 되어갔다. 국가권력에 의해 인정받지 못하면서 또한 죽어도 좋은 존재, 그리고 죽음에 의해 폭도가 된 자가 되었으며, 국가권력에 저항하는 폭도로서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광주시민은 자신의 존재를 다시 국가권력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어떠한 행위를 해야 했는가? 그렇다고 광주시민들은 국가권력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의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새로운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 태극기를 흔들고 애국가를 부르는 행위를 통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민주주의적 대한민국을 원하였다. 하지만 광주시민들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호모사케르로서 새로운 민주주의, ‘도래할 민주주의’를 선취하였다. 아니 그들이 보호받지 못한 사람이 되었지만, 결코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되지 않았고, 그와 반대로 보호가 박탈되면서 취약하고 파괴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잠재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도전적이고 혁명적인 힘”이 되었고, 또한 공동체를 이루어내면서 그들 스스로 ‘주권적 인민’을 형성하였던 것이다(J. Butler 2014, 93). 군대, 즉 국가권력이 물러난 자리에 ‘날 것’의 인민이 등장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민주주의를 만들어냈다.

 

 

  

 

3. 인민이란 무엇인가?

 

군인들이 물러나고 시민들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시기, 즉 5월 22일부터 27일 군인이 다시 도청을 점령하면서 시민군이 진압되는 날까지는 광주라는 시민공동체가 작동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저항이 새로운 뭔가로 전환되어야 하는 시점에서 갈등과 시민들의 활발한 정치가 작동하기도한 시기이다. 이 시기는 봉기의 정치를 주도하였던 세력들의 지속적인 개입과 질서유지, 시민군의 조직화 그리고 공동체의 결집을 위한 다양한 토론회 등을 통해 민주주의적 정치를 보여주는 시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투항 세력에 의해 어떻게 군부와 타협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고민하였던 이른바 재야세력들의 투항의 방식을 둘러싼 논쟁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를 걸쳐 우리는 ‘인민’을 ‘인민’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을 수 있다.

 

군인들의 발포에 대항하여 최초에 총을 들었을 때만하더라도 분노와 복수의 감정이 앞섰다면, 이제 시민군에게 총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의 상징이었다. 광주라는 자신들의 공동체를 폭력적 군부집단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시민들의 의무이자 권리였던 것이고, 시민군은 곧 시민 자체의 모습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민중들이 스스로 통치하는 자발적 능력을 보여” 준 예로서 파리코뮌과 광주코뮌의 유사성을 찾기도 한다(카치아피카스, 2002). 하지만 파리코뮌과 달리 광주시민들이 새로운 국가권력을 구성하고자 하지 않았다는 점은 구별된다. 그럼에도 광주시민들의 정치적 실천은 단지 질서의 확립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그들 스스로 광주라는 공간을 스스로 통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냈다.

 

또 한편으로 도청을 둘러싸고 도청광장, 상무관 등에서 진행된 다양한 공동체의 행사, 특히 장례식과 시민궐기대회 등은 시민들의 연대감과 새로운 집합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작용을 하였다. 어쩌면 19-21일 동안의 극한적 경험과 절대공동체의 구성은 오래된 ‘집합적 기억’을 대체하는 새로운 ‘공통의 기억’으로 재구성되었다.

 

 

5월 17일부터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되었지만, 서서히 시민들의 참여로 그리고 무기를 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주체들이 등장하였고, 22일부터 ‘수습대책위’와는 구별되는 항쟁파들의 구성과 이후 시민투쟁위원회의 구성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의 구성은 또 다시 거듭되는 새로운 주체들이다. 국가권력과의 관계를 볼 때,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 군부정권을 인정하지 않는 ‘원초적 인민’ 어쩌면 국가권력에 의해 인정받지도 못하고 보호받지도 못하는 폭도라는 점에서 또한 적극적으로 전두환정권이라는 국가권력을 인정할 수 없는 원초적 인민으로서 광주시민들은 존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총을 들었던 이들 역시 그들은 해방광주를 통해 인식하였던 주권자로서, 그리고 자기자신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던 것이다. 감옥이 그들의 영혼의 자유를 가둘 수 없듯이, 죽음이 그들의 자유의 영원성을 멈추게 할 수 없듯이, 결코 법은 그들이 추구했던 민주주의를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보이고자 하였다.

 

 

4. 5·18 광주 이후 민주주의적 계기-도래할 민주주의를 위하여

 

5월 18일부터 진행되었던 광주시민들의 주체화과정과 그들의 공동체 구성을 들여다본다면 5·18광주가 갖는 민주주의적 함의는 훨씬 더 많은 것을 갖고 있다. 김대중으로 상징화되었던 호남의 정치적 표현은 물론 한국근현대사 속에서 가졌던 호남의 특수성 역시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또한 단지 1960년 4월 혁명과 1987년 6월 항쟁을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만 존재할 수 없는 응축적 함의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5·18광주는 민중/인민의 구체적인 실체화 그리고 그들의 특이성의 표출, 경험, 민주주의의 내재적 계기로서 주권적 인민의 현시라는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1980년대 호명되었던 ‘민중’은 ‘절대공동체’와 함께 등장하였던 저항적이고 단일한 그리고 어쩌면 공동체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의 민중이었다.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이루어지면서 민주주의는 답이 아닌 해결해야 할 과제로 새롭게 등장하였다. 5·18 광주가 10주기로 추모되는 의례적 행위의 대상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 5·18 광주의 아물지 않는 상처에 대한 치유와 좀 더 분명한 진상의 규명도 있지만, 오히려 더 필요한 것은 5·18 광주가 가졌던 민주주의적 역량의 확장이다. 그것이 우리가 5·18 광주라는 과거의 사건에 머물지 않고 만들어야 할 민주주의적 미래인 것이다.

 

주권적 인민의 구성을 통해 당시 광주 시민은 그들이 바라고 구상하는 민주주의를 선취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권적 인민은 국가권력을 통해 대표되는 추상적 인민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로서 구체적인 인민의 모습이었다. 이러한 ‘인민의 시간’은 결코 항상적이지 않다. 일종의 예외상태로 주권자의 시간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주권자로서 인민은 그 시간을 점령했던 것이다. 결국 절대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를 순간적으로 만들어 냈지만, 결코 지속될 수 없었던 공동체. 그래서 결국 절대공동체의 붕괴를 체험하면서 현실의 개인, 특이성을 가진 존재들로 돌아갔지만 그들은 다시 공동체를 위한 마지막 절규를 통해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특이성을 가진 하나의 전체로 환원되지 않으면서 공통성을 만들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것이 5·18 광주에서 어느 순간에 보여졌던 ‘도래할 민주주의(déocratie àvenir)’의 모습이었다. 5·18 광주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선취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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