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바로가기 컨텐츠로 바로가기 푸터 바로가기

재단활동

HOME > 알림·홍보 > 재단활동
2238번 게시글
"5·18민주화운동, 세계 민주주의 열정과 만나야 할 때" / 심용환(역사학자)
글쓴이 : 5·18기념재단    작성일 : 2022-06-23     조회 : 199

5·18전야제(2022-05-17)



민주주의 ‘봄’ 5·18민주화운동

- 이제 5·18민주화운동은 세계 민주주의 열정과 만나야 할 때입니다

 

심용환(역사학자)

 

 

현재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기억은 ‘위기에 처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그시절의 간절함, 진상규명과 책임자처벌을 위한 치열한 투쟁을 통해 부족하더라도 많은 국민들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사 교과서 또한 5·18민주화운동을 민주주의 발전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가 기억하는 공식 기억이 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단순화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의미와 가치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기억합니다. 드라마나 영화에 드러나는 그날의 격렬했던 저항, 신군부의 만행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또한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화려한 휴가>, <택시운전사> 등 지난 10여 년간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다양한 작품이 만들어졌고 놀라운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시사 프로그램에서 꾸준히 5·18민주화운동을 다루기도 합니다.

 

하지만 5·18민주화운동에 관한 미디어의 서사 구조는 천편일률적입니다. 순진무구했던 광주시민들이 신군부에 의해 짓밟혔다 정도입니다. 군화발과 곤봉, 가공할 폭력과 억울한 죽음이 광주에 대한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기억입니다.

 

과연 이것이 다일까요? 미디어에 비추어지는 것처럼 일방적인 폭력으로 인한 민중들의 저항과 소박한 핏빛 결말이라면 이 사건은 ‘피의 일요일 사건’ 같은 표현으로 불려야 할 것입니다. 민주화운동, 민중항쟁이라는 말이 어울릴 수 없지요.

 

하지만 역사적 사실은 미디어의 서사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크게 3가지로 나뉘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전두환 정권의 군사반란에 대한 저항,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구심점 그리고 1987년 이후 과거사 청산의 촉매제입니다.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저항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12.12군사반란에서 5.17비상계엄확대 그리고 전두환정권수립으로 이어지는데 있어서 유일한 저항이자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서 가장 격렬했던 투쟁사로써 말입니다.

 

하지만 과연 제대로 알려져 있는가를 따져보면 의문이 드는 구석들이 많습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구체화된 광주지역의 조직화된 민주적 역량, 윤상원 열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강력한 저항의 실체 그리고 저항의 기간 동안 형성된 시민 공동체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대부분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운동이었다’라는 보편적 명제에 대한 동의만 있을 뿐입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이해 또한 전무한 것이 현실입니다. 1960년 4·19혁명, 1979년 부산·마산 민주항쟁, 1980년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1987년 6월항쟁. 4번의 사건이 한국민주화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사건, 사건으로만 기억될 뿐이지 각각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또한 그렇게 벌어진 거대한 역사적 도전이 어떤 배경으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급속도로 멸실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은 10일간의 위대한 항쟁에 멈추어 있지 않았습니다.

 

1983년말 학원자율화조치가 단행되기까지 약 2년반의 엄혹했던 시절에 유일하게 거리 투쟁을 벌이고 집회를 열었던 사람들이 관련 피해자와 유족이었습니다. 통상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면 재야 세력, 학생운동가 그리고 야당 정치인들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유족과 피해자 그룹이 가장 선두에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내 자식 살려내라’ 같은 감정적 구호에 의존하며 거리에 나섰고 시간이 흐르면서 형성된 ‘명예회복, 진상규명, 책임자처벌’ 같은 구체적인 요구 또한 이러한 자발적인 투쟁의 산물이었습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1983년 학원자율화조치 이후 재야인사들과 학생운동권의 격렬한 시위가 전개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 야당 정치인 김영삼이 광주 3주기를 맞이하여 23일간의 단식에 들어가면서 민주화추진협의회(약칭 민추협) 결성, 김대중의 귀국, 신민당 돌풍 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1983년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격렬한 저항은 단지 1980년 10일간의 결과가 아닙니다. 오히려 목숨을 건 단호한 도전, 절박한 피해자들의 담대한 시도에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7년 영구적으로 대한민국에서 독재체제를 퇴출시킨 6월민주항쟁 또한 5·18민주화운동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1987년 1월 초 박종철군 의문사 사건에 대한 폭로가 광주 7주기를 맞이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1980년 5월 30일 종로5가 CBS 건물에서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유혈진압을 비판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 매해 5월이 되면 ‘5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재야와 운동권의 투쟁 역량이 결집되었고 그러한 강력한 민주적 열정이 6월민주항쟁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1987년 이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6·29선언 이후 노태우정권은 김대중을 비롯한 관련 민주 인사들에 대한 사면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고 노태우의 경우 대통령 후보 기간 동안 광주문제에 대한 해결을 수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공언하였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인 1988년 1월 11일 민주화합추진위원회(약칭 민화위)를 발족시킵니다. 국가 차원에서 처음으로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담은 비디오테이프를 함께 시청하였으며, 피해자와 유족 대표를 위원회에 참여시켜서 공개적으로 의견을 청취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국가 차원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같은 해 5월 30일에 개원한 13대 국회는 노태우 정부보다 적극적이었습니다. 국회법을 개정하여 국정감사와 청문회에 관한 권한을 회복하였고 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약칭 광주특위)를 결성하여 청문회에 돌입합니다. 속칭 광주청문회가 1988년부터 1989년까지 진행되었는데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당시 청문회 활동을 통해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사건입니다.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허구성을 폭로하였고, 12.12군사반란부터 5.17비상계엄확대 그리고 전두환정권 수립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지니는 불법성에 대해 폭로하였습니다. 

 

또한 광범위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5·18민주화운동 당시 자행되었던 과잉진압과 인권 유린의 참상에 대해서도 폭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기가 되면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명목으로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인사들에 대한 사법 처리가 진행됩니다. 3차례에 걸친 판결문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헌법기관인 기존의 내각이 붕괴된 상황에서 시민들의 자율적인 결합을 통해 준헌법기관이 탄생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준헌법기관을 분쇄한 신군부는 반헌법행위를 했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여타의 민주화운동과는 다르게 사법적 결론에 도달하는 성과를 이룬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여타의 과거사 청산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대중·노무현 정권기에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비롯하여 다양한 위원회가 들어섰고 그 결과 제주4·3사건,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친일인명사전작업 등 세계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광범위한 과거사 청산작업이 꾸준히 진행되었습니다. 과거사 관련 특별법을 만들고 특별법에 의거해서 위원회가 구성되고, 그렇게 구성된 위원회의 활동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권위를 얻는 과정이 이룩된 것입니다. 최근에 진행되고 있는 가습기 살균제 사태, 세월호 사건 관련 위원회 역시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이러한 활발한 청산 작업의 근저에는 5·18민주화운동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헤아려 본다면 5·18민주화운동을 이야기하면서 여전히 10일간의 비극만을 떠올린다는 것은 참으로 무책임한 행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을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홍콩 사태, 미얀마 사태, 우크라이나 전쟁 등 세계 곳곳에서는 권력 집단에 의한 폭력, 그로 인한 광범위한 인권 유린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게 살펴본다면 미국, 러시아, EU 같은 열강들의 첨예한 대립 등 보다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있기도 합니다. 작금의 현실을 돌아본다면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마음의 빚은 강렬한 책임감과 비전으로 변화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겪었으며, 무엇을 어떻게 이겨냈는가, 여전히 우리는 꿈을 꾸는가. 이런 것들, 이러한 노하우들, 이러한 기억들, 이러한 가치들, 이러한 열정들은 단순히 우리 안에서 벌어진 과거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사건과 우리의 5·18민주화운동이 크게 연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경험이 그들의 비전이 되고, 우리의 노력이 그들의 상상력이 되는 그러한 가능성 말입니다. 멈추어있지 말았으면 합니다. 가슴에 원대한 마음을 안고 이제 세계와 보다 적극적으로 만나고 소통해야만 하는 때입니다. 

 

 

 

※ 5·18기념재단 소식지 <주먹밥> 60호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자세히 보기 클릭)

 

※ 5·18기념재단이 맛나게 지은 <주먹밥> 60호 / 정지효(편집장)

 

 

 

- 2022-02-21 / 사진=최경훈(5·18기념재단)

 

 

5·18광주민주화운동 국회청문회 연구(1988~1989) / 심용환 / 한양대학교 / 2022

A study on the national assembly hearing of the may 18 G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1988~1989) 

(자세히 보기 클릭) 

 

 

 

 

[히스토리 플레이리스트 ①오프닝] BTS 노래 속에 5·18민주화운동? 역사 노래 추천! (다니엘린데만, 심용환, 윤수현) 

/ 국가보훈처(2020-06-22) 

 

 

5.18 40주년 특집 「그 해 봄」 7회 최종회 | 가짜뉴스, 역사왜곡... 한국교회는 5.18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심용환 작가, 육순종 기장 총회장 등) / CBSJOY(2020-05-18)

 

[FOLDER: 추적_5·18_40년] #3 말투부터 손짓까지…그들의 ‘청문회 조작’/ 한겨레TV(2020-03-23)

 

 

[FOLDER: 추적_5·18_40년] #6 전·노 단죄의 이면, ‘사법부’가 ‘사법부’했다 / 한겨레TV(2020-05-04) 

 

 

[4K] 오일팔 증명사진관 두 사진기자, 5.18 광주 참상의 최초 사진을 기록하고 알리다 [#나경택 #정태원] / TBS시민의방송(2022-05-18)

 

 

 

첨부파일


2238번 게시글의 이전글, 다음글
이전글 유엔(UN) 인권이사회 파비앙 살비올리 특별보고관, 5·18기념재단 방문
다음글 “박해 받는 난민, 국제사회의 관심과 지원 필요” / 신시아 마웅(Cynthia Maung, 2022 광주인권상 수상자)
  • 페이스북공유
  • 트위터공유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인스타그램
  • 인쇄
Top이동
61965 광주광역시 서구 내방로 152 5·18기념문화센터 1층 5·18기념재단(쌍촌동 1268번지) 전화번호 062-360-0518 팩스번호 062-360-05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