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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84번 게시글
(기고)1980년 5월15일 서울대 총학생회가 서울역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도 5.18광주학살은 일어났다.
글쓴이 : 박철민    작성일 : 2020-06-20     조회 : 321
안녕하십니까? 박철민입니다. 오늘 인터넷 검색중 또 이상한 글에 대하여 글을 씁니다. 저의 말이 거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5.18민중항쟁이 40년이 지난 지금 과거의 이야기를 포장한 국민 홍보는 정말 정치인들이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정치인들은 입을 가볍게 놀리시면 안됩니다.5.18민중항쟁의 진상규명이 안된 이유는 40년이 지난 이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도덕적해이가 만들어낸 참상입니다. 5.18광주학살은 1980년 5월 15일 서울대 총학생회의 서울역 회군이 없었더라도 이미 각본이 짜진 광주학살계획 이었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이미 판대기를 짜놓고 있었습니다. 정치인의 생명은 정의와 진실의 선택입니다. 두 번 다시 5.18민중항쟁을 이용한 정치적 기망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5.18광주학살은 전두환 신군부의 하나회가 계획한 정권찬탈의 명분인 것입니다. 서울대 총학생회의 서울역 회군 이전에 이미 특전사 작전참모는 광주에서 광주학살계획을 준비하였고, 당시 505보안대는 광주지역 총학생회 회장 및 간부들을 감시하였으며, 1980년 5월17일 예비검속을 505보안대와 대공경찰(전남경찰국, 서부서, 광주서) 과 진행했습니다. 광주에서 공수부대를 이용한 과잉진압을 통하여 광주시민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편의대를 동원하여 선동을 함으로써 시위를 고조시킨 후 최후의 순간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의 신호가 하달되고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시계탑 앞 금남로에서 집단발포를 하여 순간 광주시민은 공항장애를 겪고 폭발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개같은 자식들! , 대한민국 군인이 국민에게 총을 쏴! 쏴! " 광주시민은 이때 무장을 하게됩니다. 벌집을 방망이로 쳐버린 전두환의 행위는 곧 이희성 계엄사령관의 자위권발동으로 전환되고 이때부터 광주시민은 학생들의 시위를 지켜보고 동참하다가 선량한 시위대에서 무장폭도로 바뀝니다. 전두환의 작전에 휘말리고 말았지만 그러나 마지막까지 "전두환을 찟어죽이자! " "김대중을 석방하라! " "광주시민의 시신을 인도하라! " 라고 외쳤습니다. 결국 광주시민과 학생들은 최후의 항쟁으로 전두환 신군부 독재에 저항하다가 장렬히 산화한 것입니다. 최근 항쟁지도부 김종배위원장님의 회고 발언에서" 우리는 빈총으로 싸운거나 다름없어. "당시 전남북계엄사령관이며, 전교사의 소준열사령관이 전남도청민원실 지하에 있는 무기(다이나마이트 2649상자, 수류탄, 칼빈총 공이분리) 를 무용지물 만들어 버리고 상무충정작전을 개시한 것입니다. 다이나마이트가 터지면 전남도청 주변 반경 1km는 초토화되었을 것입니다. 화순탄광 아재들이 수제다이나마이트폭탄 1상자 만들고 실습도했지만 이건 누군가 훔쳐간 것 같습니다. 이성전 선생님과의 인터뷰 내용 중 "우리가 화순동복댐에서 수제다이나마이트를 테스트한 후 8톤 트럭 7대에 2649상자를 22일 아침7시 트럭을 타고 도청에 있는 시민군에게 같다줬어."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습니다. 5.18사진에도 없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소행인지는 모르지만당시 505보안대에서는 "다이나이트폭탄을 만들어, 이건 우리 계획에 없는 일인데, 상부에 보고해야 겠다." 라고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전사 작전참모는 당시 정호용 특전사령관, 3공수여단 최세창, 7공수여단 신우식, 11공수여단 최웅과 논의를 했을 것입니다. " 광주탈환을 해야하는데 우리 얘들이 많이 죽을 수도 있는데 이일을 어떻게 해야할까요.선배님! " "광주에서 우리에게 협조할 수 있는 건전한 청년은 없을까?" "도청에 있는 사람 중 우리에게 협조해줄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이야. ""505보안대 서의남중령이 광주를 잘아니까? 좋은 방책을 세울 것입니다." "꼭, 우리에게 적극협조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데 말이야." "안되면, 전투기로 전남도청을 폭격 해야지." "아직은 아닙니다. 그건 나중에 결정하시게요. 선배님!" 겁날 것이 없는 계엄군은 1980년 5월 27일 새벽1시 정보경찰을 길잡이로 하여 무장헬기, 전차, 장갑차를 동원하여 시민군을 진압했습니다. 정치인들은 이제 두 번 다시 5.18광주학살이 계획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언론 인터뷰로 자신의 행적을 연계하여 치하하는 연예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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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 박철민 2020-06-22
    참고사항-출처:위키백과사전

    이리역 폭발 사고

    이리역 폭발 사고(裡里驛爆發事故)는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라북도 이리시(현 익산시)의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 폭발 사고다. 1993년 3월 28일에 일어난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와 함께 최악의 철도사고로 손꼽힌다.

    사고 원인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의 전신) 소속의 화물 열차 제1605열차는 당시 정식 책임자도 없이 다이너마이트와 전기 뇌관 등 40t의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에서 출발 대기하던 중 폭발사고를 일으켰다.

    당시 수사당국의 발표에 따르면 한국화약 호송 담당 직원 신무일이 술을 마시고 잠든 뒤, 추위를 막기 위하여 촛불을 켰다가 촛불이 다이너마이트 쪽으로 넘어진 것이 원인이었다. 원칙적으로 열차의 단선 교행은 폭탄 및 화학 화물 화차가 여객 열차(만일 새마을호라 할지라도)보다 우선 순위로 운행이 되고 있으며,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신호장, 신호소, 간이역은 물론 모든 철도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 하는 것을 무시하였고, 허술한 안전 의식이 인재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피해 상황

    당시 익산역에는 지름 30m, 깊이 10m의 거대한 웅덩이가 파였고 이리 시청 앞까지 파편이 날아갔다. 이리역 주변 반경 500미터 이내의 건물 9,500여채에 달하는 건물이 대부분 파괴되어 9,973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사망자는 59명, 부상자는 1,343명에 달하였다. 이 중 철도인은 16명이 순직하였다.

    1,647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철도 시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는데, 이리역사를 비롯하여 구내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등 건물이 심각한 균열 또는 붕괴의 피해를 입었고, 기관차 5량, 동차 4량, 화차 74량, 객차 21량, 기중기 1량이 붕괴되었고, 이리역을 통과하는 호남선 130m와 전라선 240m가 붕괴되어 총 23억여원의 재산 피해를 낳기도 하였다.

    당시 이리시 창인동 (현. 익산시 창인동)에 있던 익산군청 건물이 진동으로 심각한 균열이 발생해 1979년 익산군청이 익산군 함열읍 (현. 익산시 함열읍)으로 이전하게 된다. 또한 이리고등학교 앞에 위치해 있던 남성고등학교 건물 일부가 붕괴되어 현재 익산시 신동으로 이전하고 본래 위치한 자리에 남성맨션 아파트를 지었다.

    이리시와 인접한 익산군 오산면, 황등면, 삼기면 및 김제군 백구면 등에서도 진동이 느껴졌고 약 30km 떨어진 군산시에서도 폭발음 신고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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