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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5·18 정신을 기리고 계승하기 위해서 기념재단을 설립해야 한다는 원칙에는 누구도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기념재단 설립 과정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지배 권력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이 문제였다.

  권력은 온갖 위협과 회유로 피해 당사자들 사이에 갈등을 부추겨 기념재단 설립 움직임을 겉돌게 했다. 그들은 국가의 정보·수사기관들을 동원해 이른바 ‘오월 분열 공작’을 폈다. 또한 오월의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지도 못한 시점에서 기념재단 설립을 거론하는 것이 옳으냐는 지역사회의 일부 논란도 짐이 되었다. 특히 기념재단의 체제와 운영 방식, 그 주체 등을 두고 5·18 당사자들 및 관련자들 간에 의견이 난립함으로써 기념재단 설립은 좌초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광주·전남 지역사회 구성원들을 비롯한 국내외 민주세력들의 간단없는 노력과 투쟁들로 마침내 기념재단 설립이 가능하게 되었다.


1) 기념재단 설립의 단초

  민주주의를 갈망해온 국민들은 1980년대 내내 여러 가지 어려운 정치·사회적 국면들 속에서 5·18을 어떻게 기억하고 기념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다. 무엇보다도 전두환·노태우 등 군부 독재 세력들의 반국가적 범죄 행위에 대한 심판을 일정 수준에서 끝내고자 하는 당시 정국의 흐름은 기념재단 설립에 큰 방해물이었다. 이른바 ‘광주특위’가 1989년 12월 30일 전두환의 마지막 증언을 끝으로 힘을 잃어가자, 기념재단 설립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우려마저 고조되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서면서 정치권이 먼저 기념재단 설립 문제를 들고 나왔고, 이로써 기념재단 설립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먼저 평민당의 ‘광주·전남지역방문의원단(단장 최영근 수석부총재)’은 1990년 1월 19일 광주시 ‘운림가든’에서 5·18관련단체 회원 등 재야단체 회원을 포함한 시민과 각계 각층 대표 2백여 명을 초청, 정책설명회를 갖고 5공 청산, 광주 문제 해결방안 등에 대한 당의 입장을 설명했다.

  이날 모임에 참석했던 송기숙 교수(전남대)는 “평민당에서 만들어 놓은 광주 관련 법안 초안은 개인적인 명예회복과 배상에만 중점을 두고 있으나, 개별보상과 함께 집단보상의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5·18정신 계승을 위해 기념 사업회를 재단법인으로 만들 수 있는 법적 뒷받침이 필요하며, 이 기념사업회가 주축이 되어, 상무대가 옮겨가면 그곳에 공원을 만들고 기념관을 건립해야 한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최영근 부총재와 김원기 총무는 이날 설명회를 마친 뒤 오후 광주시 북구 망월동 5·18묘역을 참배한 다음, 그랜드호텔에서 5·18단체 대표들과 광주지역 재야원로인사 20여 명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갖고 5·18치유책 등을 논의했다. 이때 광주지역 민주인사들은 5·18명예회복과 보상 및 배상 외에 5·18기념사업을 위한 재단 설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5·18 관련 법안의 국회통과가 확실시 된 상황에서 명예회복과 보상 및 배상은 어느 정도 진행될 것으로 전제하고, 이후 5월 문제 해결 과제로써 가장 중요한 기념사업을 위한 제도적 근거 마련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이어 오월 관련 단체들도 나섰다.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유족회·부상자회 등으로 구성된 ‘5월운동협의회’는 1월 20일 오전 광주YWCA에서 임시국회가 다룰 광주문제 특별법 처리 등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갖고, “광주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학살책임자들의 의법 처단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협의회는 이날 “정치적 야합체인 민자당에 전 국민의 이름으로 경고한다”는 제목의 성명서를 통해, “광주문제의 해결과 5공비리의 척결은 전 국민의 합의 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민자당에서 몇 푼의 금전으로 광주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바, 광주시민과 전남도민의 명예를 더럽히는 민자당의 해결책을 국민의 이름으로 거부한다”고 밝혔다.

  협의회는 또한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 등 제반 반민주 악법을 폐지하고 전 국민의 요구인 지방자치제를 빠른 시일 내에 실시해 줄 것”을 요구하면서, 이를 관철하기 위해 결연한 투쟁을 전개해 나갈 것을 다짐하였다. 이는 앞서 언급된 송기숙 교수 등 재야원로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5·18 문제 해결을 촉구한 것이었으며, 그 핵심은 학살책임자 처벌이었다.

  5·18 문제와 기념사업 문제를 두고 송기숙 교수를 중심으로 한 5·18 관련 교수그룹 및 재야원로들과 5월운동협의회가 다소 시각차를 드러내기는 했지만, 두 조직이 강온 양면으로 접근함으로써 문제 해결을 앞당기는 결과를 낳았다는 평가도 받았다.

  한편 광주시는 국가의 보상에 대비하여 움직였다. 광주시는 1990년 3월 7일 광주특별법안의 국회 통과에 대비하여 부시장을 책임자로 하는 ‘5·18치유특별대책반’을 구성하고 5·18업무 전담부서인 지원담당관 밑에 지원 2과를 신설키로 했다. 부시장을 반장으로 한 5·18치유대책반은 원만한 보상을 위한 조직이었다. 그리고 지원 2과는 향후 보상이 실시될 경우 순수 보상업무를 전담토록 한 것이었다. 광주시는 또한 보상 업무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 지원과장을 비롯하여 시청 직원 3명을 서울에 파견, 5·18보상법의 정부 입법과정에 참여시켰다. 광주시는 이처럼 재야원로 및 5월운동협의회와 달리 실질적 보상을 위한 행정 체계를 갖추어 갔다. 그리고 이러한 준비와 실행 과정 끝에 실제로 1990년 12월 5·18민주화운동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1차 보상이 실시되었다.

  정계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5·18 문제 해결에 나서고, 정부가 피해 보상을 통한 치유책을 펴면서 기념재단 설립은 당연한 과제로 떠올랐다. 특히 정부의 금전적 피해 보상 논의 과정에서 5·18 문제를 돈으로 해결해야 되겠느냐는 여론이 일자 5·18 당사자들은 기념재단 설립을 비롯한 5·18기념사업을 보다 더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기로 의견을 모았다.

  ‘광주보상’ 이후 처음으로 맞이한 1991년 5·18주간에 ‘5·18기념사업추진위원회’ 이광우 추진위원장(전남대 교수)은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광주민중항쟁은 정권의 의도와는 달리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에 영원한 준거가 되어 민주화 투쟁의 활력을 끊임없이 재생산할 것이다. 또 우리 역사는 광주항쟁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서는 한걸음도 진전할 수 없다는 것을 국민들은 깨달아야 한다. ···중략··· 이에 5·18광주민중항쟁 희생자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 범국민추진운동 등 다양한 사업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사업기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기금이 모아지면 구체적 사업계획에 착수할 것이다”고 하여, 기념사업의 구체적 추진을 천명했다. 1990년 12월 광주 1차 보상 이후 위령탑건립 및 기념사업 등 다양한 측면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됨으로써 5·18기념사업 추진은 점차 동력을 갖게 되었다.


2) 재단 설립 논의

  1990년 8월 6일 <광주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의 제정을 전후하여 기념사업 문제가 일부 거론되었다. 하지만 기념재단 설립 문제가 오월의 중심 과제로 떠오른 것은 1993년 5월 10일 ‘민주항쟁기념국민위원회(이하 국민위원회)’ 창립대회부터였다. 그리고 5월 13일 김영삼 대통령의 ‘5·13특별담화’ 발표,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에 대한 군 형법상의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혐의 검찰 고소 등이 이어지면서 기념재단 설립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한편 5월을 어떤 방식으로 기념할 것인가를 두고 오월항쟁 당사자들 및 관련자들의 의견 차이로 재단 설립 논의가 중복적으로 나타나는 어려움도 한때 있었다. 그러나 서로간의 이견 조정 끝에 기념재단 설립을 위한 단일안이 합의되었다.

  기념재단 설립 논의 과정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93년 5월 들어 전국 규모의 5·18 단체가 출범하여 광주문제 해결 5대원칙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기념사업’ 추진을 기념재단의 설립에 두었다. 이런 가운데 5·18광주항쟁 13주기를 앞두고 재야와 시민운동단체가 공동 참여한 5월 광주항쟁 진상규명 및 6월 항쟁정신 계승을 위한 전국 규모의 범국민운동단체가 출범했다. 문익환 목사 등 각계 인사 3백여 명은 5월 10일 서울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국민위원회 창립대회를 갖고, 5월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5·18, 6·10의 국가기념일 제정 등을 위한 국민운동에 들어갔다.

  이때 발족한 국민위원회는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물론 시민운동 단체 인사들까지 대거 참여한 명실공히 전 국민적 연합기구로 5·18 문제를 다루는 최초의 전국 조직이라는 데에 의의가 있었다. 이 모임을 주도한 김근태 국민위원회 집행위원장은 발족 취지와 관련, “5월항쟁의 진상이 명명백백히 규명되고 그에 상응한 조치가 수반될 때 민족정기는 바로 설 수 있다”면서, “5·18과 6·10항쟁은 같은 뿌리인 만큼 국민적 동의를 얻어 민주기념일로 제정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국민위원회는 5·18 문제 해결방안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제 도입, 광주특별법 제정, 가해자 사법처리, 기념사업’ 등의 원칙을 설정하고 5·18 관련 단체들과 정부 상호간의 의견 조정에 참여하게 되었다. 국민위원회는 또한 5·18과 6·10을 ‘민주항쟁기념일’로 제정하기 위한 범국민서명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광주문제 진상규명을 위한 공청회, 시민토론회, 6월항쟁 관련 행사 등 다각적인 활동을 추진하였다.

  국민위원회의 출범에 앞서 1993년 벽두부터 5·18 당사자 및 관련자 중심의 단체들을 중심으로 5·18재단 설립을 위한 구체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즉 향후 정부로부터 지급받게 될 5·18보상금 일부를 기금 형식으로 모아 5·18정신계승 및 기념사업을 추진하게 될 ‘5·18재단’ 설립이 가시화 되었다. 이와 같은 재단 설립의 움직임들은 5·18 당사자 및 관련자 단체, 광주지역 재야인사, 광주시민단체, 광주시의회 등 다양한 차원에서 일어났다.

  그 가운데서도 ‘5·18광주민중항쟁동지회’(이하, 오항동)와 ‘(가칭)5·18재단설립준비위원회’(이하, 설립위)가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다. 설립위는 1993년 5월 16일 5·18 관련 교수 등 정계와 학계 및 재야단체인사 등이 주축이 되어 조직되었다. 이들 중 재단 설립의 물꼬는 오항동이 먼저 텄다. 오항동은 1993년 3월 17일 임시총회를 열어 자체기금을 조성하는 방안을 논의하였다. 설립위도 5월 16일 발기인 모임을 갖고, 기금조성 방법과 구체적 사용내용 및 향후 일정 등을 협의했다.

  이들 두 단체의 움직임은 곧 기념재단 설립 논의를 여러 층위로 확산시켰다.

  ‘5·18 기념사업사업추진위’와‘ 5·18 광주민중항쟁연합’,‘ 광주시의회 5·18특위’,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은 7월 10일 회동을 갖고 5·18 진상규명과 기념사업을 병행키로 하고 7월 15일 전체 운영위원회에 이를 상정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이는 5월 단체 등이 지난 2월 5·18문제 해결방법과 관련, ‘선 진상규명 후 기념사업’ 등 5대 원칙을 사실상 수정한 것이어서 관심을 모았다.

  이후 5월단체는 5·13대통령 특별담화 때 제안되었던 ‘5·18기념사업 범시민대책위’를 시민 전체 합의하에 구성, 이를 토대로 광주시에 법인 설립을 요구했다. 이들은 또 망월동 묘역 성역화와 관련, 광주시가 추진 중인 ‘5·18기념사업추진협의회’에도 운영위 결정에 따라 참여하기로 했다. 그리고 기념사업추진협의회의 활동을 ‘묘역 성역화’사업에 국한하지 않고 시민대책위 등과 조율을 통해 ‘상무대 공원화’와 ‘전남도청 기념관 설립’ 등 전체 기념사업까지 확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5·13특별 담화 후 5·18단체의 ‘선 진상규명’ 요구와 일부 단체의 반대로 답보상태에 머물렀던 성역화 사업 등 5·18기념사업이 활발히 추진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광주시의회도 5·18특위를 확대 재구성해 이를 뒷받침했다.

  한편 설립위는 9월 16일 광주시 화랑궁식당에서 조아라 광주YWCA명예회장, 명노근·송기숙 전남대 교수, 문병란 조선대 교수, 정동년 5·18광주민중항쟁연합 상임의장 등 이 지역 재야인사와 5월 관련 인사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간담회를 갖고 명노근 교수를 재단설립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또 향후 ‘5·18재단’은 ‘1980년 당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숨지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에게 지급되는 보상액 중 일부를 기금으로 조성, 앞으로 장학사업과 학술연구사업, 5·18민주화 운동에 관한 사업 등을 전개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설립위의 발기인 대회에 발맞춰 다음날 오후 6시 광주 YMCA에서 오항동의 ‘5·18 정신계승을 위한 기금모금 임시총회’가 열렸다. 이날 회의는 바로 전날 오항동 일부회원과 재야교수 등이 주축이 된 설립위에서 정관 초안까지 작성한 상태에서 진행된 까닭에 두 단체를 중심으로 한 통합재단의 설립 여부에 관심이 모아졌다. 그런데 이날 회의에서는 오항동의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재단설립준비위’를 구성하기로 결정함으로써 ‘2개의 5·18재단’이 탄생할 우려를 낳았다.

  이후 1993년 후반기에 접어들어 기념재단 설립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설립위는 11월 13일 ‘기념재단설립추진위원’ 47명을 위촉하고, 1993년 내에 재단을 창립하기로 했다. 설립위는 3억 원의 기금으로 재단을 설립하고, 이로써 진상규명과 기념사업은 물론 5·18단체 회원 등의 권리 회복 및 각종 복지사업을 펼치고, ‘5·18시민상’을 제정하며, 지역의 우수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 는 등 장학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설립위가 재단 설립 활동을 활발하게 벌여나가자 오항동도 이에 맞서 기념재단 설립을 독자적으로 추진키로 했다. 오항동 회원 등 433명은 5월정신계승 및 기념사업추진을 위한 ‘5·18기념재단’을 항쟁관련 구속자들을 중심으로 정식 출범시키기로 하고, 11월 18일 발기인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들은 같은 성격의 재단설립을 추진 중인 정동년 오민련 상임의장 등 기존의 재단설립준비위원회 측과 9월부터 3개월 동안 진행해온 통합협상이 결렬되자 재단을 따로 설립키로 한 것이었다.

  한편 설립위는 1993년 11월 18일 오후 6시에 광주시 동구 금남로 3가 현대예식장에서 가칭 ‘5·18 기념재단 설립을 위한 발기인대회’를 개최했다. 설립위 측은 광주·전남지역 재야인사와 5·18 관련 단체회원 등 이날까지 모두 433명이 발기인으로 등록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동원 재단설립추진위원장은 개회사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지 결정해야 할 중대한 시점에 서있다” 면서, “우리 모두 80년 5월 정신의 바탕에서 진상규명을 위한 노력과 5월정신 계승을 위한 각종 사업을 벌이기 위해 기념재단을 만들게 됐다”고 밝혔다. 또 이날 대회에 초청된 문익환 목사는 환영사에서 “우리 모두가 분열되지 않고 똘똘 뭉쳐 하나가 돼야한다”면서, “우리가 하나가 될 때 조국도 하나가 된다”고 역설했다.

  설립위와 오항동 두 단체의 재단 설립 움직임에 대하여 시민들의 비판이 일자 이들을 비롯한 5·18 단체 관련자들은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설립위는 우선 12월 2일 재단 통합을 위해 ‘9인 위원회’를 결성했다. 9인위원회 위원들은 윤영규 전전교조위원장, 김동원·명노근·송기숙·이광우 교수 등 전남대 교수 4인, 조비오 신부, 문병란 조선대 교수, 이기홍 변호사, 강신석 목사 등이었다.

  위원회는 12월 7일 오후 6시‘ 5·18재단 통합을 위한 9인 위원회’ 회의를 광주 YMCA 백제실에서 개최코자 하였으나, 오항동 측의 회의 연기 요청에 따라 이를 뒤로 미루었다. 그리고 12월 14일 오후 6시에 YMCA 2층 자료실에서 ‘5·18재단 통합을 위한 9인 위원회’ 회의를 다시 열었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이날 4시간 여 동안 논의한 끝에, 통합되는 기념재단의 이사를 31명으로 구성키로 하고, 오민련측에서 6명, 오항동측에서 5명 등 11명을 우선 선출키로 했다. 나머지 이사 20명은 9인 위원회와 1차로 선출되는 11명의 이사가 협의해 추대키로 했다.

  9인 위원회는 또 통합재단 창립 때까지 오항동이 추진하고 있는 재단의 실체를 인정, 재단 설립 작업을 추진하고 어느 한 측이 이안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 수용하는 측에 9인 위원회가 참여키로 한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는 오항동과 오민련의 갈등이 노출되어 재단 통합이 어려울 것으로 보였다. 오민련 측이 오항동과의 1대1 통합은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지난달 오항동이 오민련을 탈퇴한 것과 관련해 먼저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오민련과 오항동 측은 1993년 12월 21일 통합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각각 재단이사 선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후에도 설립 주체와 이사진 구성 문제가 논란을 겪으면서 재단 설립의 꿈은 1994년으로 넘어갔다.

  기념재단 설립 추진 단체들은 여러 차원의 논의를 거쳐 마침내 1994년 7월 21일 통합 모임을 갖고, “기념재단이 5월단체 간의 이견이나 분열상으로 비춰져서는 안 된다”는 데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 뜻에 따라 “창립총회를 열어 현 이사진이 모두 사퇴하고 정관상의 출연금을 내는 모든 뜻있는 단체·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케 해,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이사진을 구성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1994년 7월 26일 오전 9시 광주 YMCA에서 설립위 측의 ‘(가칭)5·18기념재단(이사장 김동원)’은 기자회견을 갖고 “현 이사진이 전원 사퇴하고, 다음달 18일 창립대회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지역 재야인사를 망라한 새 이사진을 구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회견에는 김 이사장을 비롯해 오민련 정동년 의장, 오항동 위인백 회장, 윤한봉·김상윤·김현장 씨와 민주당 광주시지부 윤강옥 사무처장, ‘5월 성역화를 위한 시민연대모임’ 윤장현 공동의장 등 광주지역 재야인사 20여 명이 참석해 뜻을 같이 했다. 김 이사장은 “5월 단체들이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기념재단을 설립키로 했다”며, “오늘 선언을 통해 단체 간 갈등과 반목을 일소하는 계기로 봐도 좋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재단통합선언은 “광주의 재야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가진 중립적인 인사들의 오랜 중재의 결과였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진통과 조율 끝에 ‘5·18기념재단’이 드디어 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1994년 8월 30일 ‘5·18기념재단’ 창립발기인대회를 거쳐 12월 22일 내무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인가를 받아, 설립의 진통을 겪던 5·18기념재단은 드디어 ‘20년 역사’의 문을 열었다.


※ 『5·18기념재단 20년사』(2014)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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