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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도화선 전남대 시위
전남대 정문에서 대치중인 학생들  5월 18일 오전 9시경 전남대학생 200여 명이 대학 정문에서 계엄군에게 도서관 출입을 요구하다가 포고령에 의거, 거절당하자 사전에 은닉·지참한 돌을 책가방에서 꺼내어 투석·대치함으로써 광주사태는 시작되었다.  -1982 육군본부 계엄사(戒嚴史)전남대 교문에는 이날 새벽 진주한 7공수여단의 경비병들이 학생들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 출입을 제지당한 학생들이 한순간 경비병들을 향해 돌을 던지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돌을 주울 만한 곳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학생들은 돌을 미리 가방에 담아 왔던 것이다.  -2017 전두환 회고록 1권 390쪽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7공수여단 본부 소속 장병 10/76명(장교/사병), 33대대 45/321명, 35대대 39/283명이 17일 밤 전북 익산에서 광주로 옮겨온다. 33대대는 전남대와 광주교대, 35대대는 조선대와 전남대 의대에 배치된다. 신군부 쪽은 항쟁의 도화선이 된 정문 앞 충돌에 대해 입이라도 맞춘 듯 ‘학생들이 돌멩이를 미리 가방에 준비해간 것’ 으로 기록하거나 진술하고 있다. 이런 주장은 1995~96년 5ㆍ18 재판까지 이어지며, 2017년 4월 펴낸 ‘전두환 회고록’ 에서 정점에 오른다.  
광주교도소 습격설
옛 광주교도소 5·18 사태 때 계엄군은 광주시내는 물론 광주시 외곽 등 여러 곳에서 흉기 또는 총기를 든 시위대의 공격을 받았지만 공격 양상이 가장 집요했던 것은 광주교도소에 대한 공격이었다. 모두 여섯 차례나 무장시위대의 공격을 받았다. 북한이 광주에 있는 여러 고정간첩망에게 광주교도소를 습격하여 해방시키라는 지령을 내리는 것이 우리 정보당국에 의해 포착되었다.- 2017 전두환 회고록 1권 518쪽다. 교도소 작전5.21 19:20분경 노획한 장비로서 15대대의 5명이 고속도로를 차단하기 위해 차단지점에 도착하자 폭도가 고지 위에서 기관총을 난사, 주위에서 구경하던 민간인 2명이 사살 당하고 2명 부상5.2200:40-00:50 사이에 차량에 탑승한 폭도가 고속도로를 이용, 주둔 지역에 대해 사격을 가하면서 접근.09:20분경에 폭도 6명이 기관총을 난사하면서 교도소로 접근했으나 50미터 전방의 바리케이트에 봉착 진출을 못하자 이에 11대대에서 즉 각 응사 2명 사살, 4명은 부상을 입고 도주.10:20 11대대 지역에서 소방차에 탑승하여 공격해오는 폭도 4명에 대해 공격.19:00-19:40 헬기 공수작전이 끝나고, 전방 추진 진지에서 철수 중트럭에 분승한 폭도의 사격을 받고 즉각 응사 1명 사살하고 트럭 1대 CAR 1정, LMG실탄 등 노획23;00시 경 폭도는 광주시내 쪽에서 주간에 아군이 점령하였던 추진 진지에 약 2시간에 걸쳐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 개시.- 1980. 제3특전여단 [광주소요사태 진압상보] 제3공수여단은 5월21일 오후 5시30분께 광주교도소에 도착, 5월24일 오후 2시 15분 송정리 비행장으로 철수할 때까지 대략 사흘 정도 교도소에 주둔했다. 3공수는 21일 도청 집단발포로 시위양상이 무장투쟁으로 전개되자, 신군부 지휘부의 명령에 의해 초기 주둔지였던 전남대를 떠나 외곽인 광주교도소로 이동하게 된다.제3공수는 광주사태 전투상보를 통해 6차례 정도 교도소 주변에서 사격이 있었으며, [6.주요작전 및 교훈]에서는 광주교도소 [접근]이란 표현을 사용했다.다만, 전투상보 증 [5.작전경과 및 결과]에서는 [광주교도소 폭도 기습, 피아 교전]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기습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전두환 씨와 일부 극우인사들이 주장하는 교도소 습격설은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를 기본 자료로 삼고 있다.  
최후진압 상무충정작전
도청앞 광장에 진주한 계엄군 전차 상무충정작전 지침수신: 전교사령관참조: 제2군사령관가. 5월18일부터 시작된 광주지구 및 그 일원의 소요사태는 23일 이후 이성을 되찾아가는 징후가 보임나. 폭도들은 아직도 상당수가 무기를 통제하고 있고 주요 도로변에는 기관총을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구축하는 등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양민을 협박하고 난동을 부리고 있음.다. 군은 양민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민족의 비극을 막기 위해 선무작전, 봉쇄작전을 실시하여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성을 찾도록 지도했고 비상한 자제로서 민족 역사상 오점을 피하도록 해왔음.라. 광주지구의 소서민층에는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의 고갈로 심대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의약품의 고갈로 노약자 및 환자의 희생이 증대되고 있어 이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새로운 집단 범죄의 발생이 염려됨.마. 지역 내의 폭도들의 상당수가 살인방화 등의 범법자, 흉악범 및 불량배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계엄군의 선무공작에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임.(중략)- 1980.5.25. 계엄사령부 [충정작전지침] 전두환 세력이 장악한 계엄사는 80년 5월 25일 광주 재진입 작전 계획을 수립, 5월27일 새벽 1시를 기해 최후의 진압 작전을 실시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계엄사 등은 충정작전의 명분으로 폭도들이 선량한 양민을 협박하고 있으며, 식량, 생필품 고갈로 광주시민들이 심대한 고통을 받고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특히 폭도들이 살인 방화 등 범법자, 흉악범으로 구성돼 계엄군의 선무 공작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전남도청을 지킨 최후의 시민군은 정말 흉악범, 불량배였으며, 광주시민들은 계엄군이 다시 광주에 들어와 평정해주기를 바랐을까.  
5·18유공자 귀족 예우설
‘5·18유공자’, 1990년 당시 화폐로 1인당 평균 5,800만원 받았다. 최고액은 3억 1,700만원, 최저액 500만원. 19세에 경찰을 닭장차에 가두었다는 공로로 2억을 보상받은 윤기권은 2001년 월북해 대남방송하고 있다. 이만이 아니다. 매월 연금을 받는다. 최고는 월 4,226,000원, 최저는 월 362,000원. 1990년의 4억, 지금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일까? 태극무공훈장, 그 수훈자가 사망하면 참모총장이 상주가 되는 엄청난 훈장이다. 그런데도 6·25전투에서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은 월 18만원만 받는다.‘5·18유공자’, 본인 배우자 자녀들 모두 국가고시, 임용고시에 5-10% 가산점을 받아 정부기관, 국가기관, 경찰, 법원, 검찰, 교원, 정부산하기관, 국영기업 등의 자리를 거의 싹쓸이하고 있다. 금융기관 대기업 일자리까지 최우선으로 차지한다. 채용시험이 필기·실기·면접 등으로 구분되어 실시되는 경우에는 각 시험마다 가점을 받으며, 둘 이상의 과목으로 실시되는 시험에 있어서는 각 과목별로 가점을 받는다. 머리 좋은 젊은이들이 고시촌에서 고생하며 5수 10수하면서도 탈락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5·18유공자가 누리는 귀족대우 - [10% 가산점에 병역감면까지 받는 금수저] 전단지 2004년의 통계만 보아도 5-10% 가산점을 받는 5·18유공자 자식들이 공무원 7급의 89.4%, 9급의 85.6%를 독차지 했습니다. 법원 검찰 서기의 95%가 그들입니다. 그러니 공시생들에 남은 자리가 어디 있습니까? - 2017.3.26. 지만원의 시스템클럽지만원 등 극우보수 세력은 5·18유공자를 비방하면서 △거액의 보상금과 연금 수령 △유공자 가산점을 통한 공직 싹쓸이를 근거로 들고 있다. 특히 6·25 참전용사 등 타 유공자와의 수혜 비교를 통해 5·18유공자가 지나친 특혜를 받고 있다고 강조한다. 왜곡·폄훼의 양상은 다음 세대의 권익마저 위태롭게 만든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예컨대 유공자 가산점의 경우 자녀의 취업 문제와 결부시켜 위화감을 조장한다. 극우보수 세력의 프레임 안에서 5·18유공자는 대한민국의 특권층으로 나머지 다른 집단에게 피해를 끼치는 존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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